기억할만한지나침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등), 은행나무, 2024.

시월의숲 2024. 12. 1. 21:22

내가 쐐기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쐐기풀 차가, 산책길에 한 아름씩 꺾어오는 불가리스 쑥이, 여름 내내 어디에나 지천인 황금빛 골드루테 다발이 이 오두막의 삶에서는 아주 두드러지는 사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루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15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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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돌연한 사건과 마주치고, 그것을 스쳐 지나가고, 그런 후 그에 대한 생각에 잠긴 채 살아가게 되겠죠.(23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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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면, 그 말은 내 편지가 나를 영영 떠난다는 의미였다. 내게서 나온 말은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혹은 나는 기억을 상실한 말과 다름없게 되리라. 그리하여 수십 년이 흐른 후, 어쩌면 나는 어딘가에 남아 있을 내가 쓴 편지들을, 내 말의 조각들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히 대부분의 편지들은 폐기되었고 받은 사람의 기억에서조차 떠나버렸으므로, 모든 시도는 헛될 것이다.(28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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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라도 나는 스스로 희망하지도, 기대하거나 계획하지도 않은 미래를 살게 되리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안개와 같은 그 확신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나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내가 앞으로 가는 방식이었다.(34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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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숲을 산책하다가 마주친 두 그루의 나무를 각자 껴안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무를 포옹한 자세로 서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단단한 껍질 아래서 나무의 떨리는 내면이 느껴질 때까지. 마침내 입 없이도 하나의 어휘가 저절로 말해질 때까지.(36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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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꺼낸 가족이라는 어휘가 내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내 안에는 그것이 바로 그가 나를 떠나는 방식일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있었다. 가족을 통하여, 가족 안에서 차츰 멀어지는 그런 방식으로, 어떤 가족의 식탁 위에 나를 위해 차려진 따뜻한 수프 한 접시의 이름으로, 그리고 마치 발이 없는 것처럼, 마치 영원히 닫히지 않는 나선형의 계단에 의해 저절로 삼켜지듯이, 그렇게 해뜨기 직전의 별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모습을 감추려는 것이라고 믿었다.(38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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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은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게 될 가장 확실하고도 결정적인 사건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언젠가는 누군가의 곁을 떠나게 되는 걸까.(39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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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해서 귀 기울임으로써 그는 음악을 시작하고 있었다. 보리수 안의 바람, 강비탈에 핀 부처꽃들의 기울어짐, 언젠가 붉은 가을, 자갈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자국, 기차가 도착하는 신호음,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책상 위의 편지들이 흩어지는 소리, 서로 은밀하게 마주 잡는 두 손, 새들이 만들어내는 허공, 하나의 편지 위로 내려앉는 또 다른 편지, 그리고 붉은 가을. 오직 하나의 어휘가, 하나의 음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를 때까지. 마침내 모든 음들이 소리의 최소 성분으로 수렴될 때까지. 멜로디 없는 음악. 최소의 음악. 돌과 나무의 내부로부터, 저절로-중얼거림. 겨울 아침 서리의 속삭임. 지금 여기 없는 것들의 기억. 그 어휘가 무엇일까. 강물에 비친 하루.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45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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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단 한 번 마주친 어떤 사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생각에 잠긴 채,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 주변을 맴도는 다른 일들에 관해 쓰면서 일생을 보내게 되겠지요."(49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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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음악은 그 바우키스의 변신의 순간에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에 귀 기울이기입니다. 그 순간을 이루고 있던 오래된 소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한번 공명한 소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그것은 가을이었을까. 강물은 어떤 소리를 냈을까. 그리고 바람은. 돌은. 마지막 편지의 말은. 붉은 가을이었을까. 최후의 순간 바우키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52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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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 씨의 죽음이 시간이 지나면 쉬어버리고 말 미역줄기무침보다 못할 것은 없었다. 독고 씨의 죽음 역시 보다 공정한 가격표가 붙을 자격이 있는 거였다. 그의 삶이 남긴 업적이 대단하거나 대단히 조명할 만한 죽음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의 죽음에는 그에 따른 정당한 애도의 몫이 있을테니까. 그렇게 현수는 독고 씨의 죽음에 너무 일찍 '그래도 싼' 가격표를 붙인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 시작했고, 독고 씨의 죽음에 대한 진짜 공정한 가격은 무엇인지 다시 고심해 보기로 했다.(107쪽, 박지영, 「장례 세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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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이런 애도도, 이런 생각해본 적도 없는 선의도 있는 거라는 걸 현수는 처음 알게 되었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 애써 하는, 어떤 가격을 매겨도 공정하지 않은 완벽히 불공정한 선의.(142~143쪽, 박지영, 「장례 세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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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단 한 번이라도 손에 쥔 적이 있던가. 삶은 언제나 나를 쥐고 흔들 뿐이었다.(159쪽,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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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한 트럭의 미움 속에서 미미한 사랑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데.(164쪽,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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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168쪽,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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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불편해. 혼자 있을 땐 괜찮지만 우리 집이든 남의 집이든 타인과 함께 있으면 항상 불편해.(196쪽, 이서수, 「몸과 무경계 지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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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왜 성별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새하얀 도화지 앞에 선 것 같은 마음이 들까. 그러나 무겁고 답답한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색이든 칠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이 더 중요했지요. 색종이처럼 이미 색상이 정해져 있는 종이가 아니라 제가 느끼고 인지하는 색을 칠해볼 수 있는 종이 말입니다. 게다가 덧칠도 가능하고, 색을 마음껏 섞어볼 수도 있었지요. 흔히 말하는 색채의 마술사처럼요. 그것이 저라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하여 유일하게 일관된 것이었습니다.(210쪽, 이서수, 「몸과 무경계 지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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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껍데기뿐이라도 괜찮아?

네가 왜 껍데기야?

알맹이가 없어서.

알맹이는 어디로 갔는데?

알맹이는 확장되기 위해 바깥을 돌아다니는 중이야.

단밤은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윽고 말했습니다.

나도 같이 돌아다니면 되겠네.(241~242쪽, 이서수, 「몸과 무경계 지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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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밤이 검지로 창틀의 먼지를 그러모아 창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부스스 낙하하는 먼지를 바라보는 동안 눈이 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경계를 사라지게 하는 눈이요.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 사람이든 사물이든 한없이 움츠러들고 뻣뻣해질 때 경계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모두가 선분 없이, 모서리나 그늘 없이 하얗게 이어지게 만드는 눈이요. 마치 단밤과 함께 있는 시간 같은 그런 눈이요.

 표정 없는 눈을 그러모아 표정 있는 눈사람으로 만드는 건 인간뿐이야.

 제 말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감지했는지 단밤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표정이 없으면 불안해져서 그런 거야. 상대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고, 그걸 곧장 따라 하기도 하니까. 인간은 가여운 존재야.

단밤은 그렇게 말하며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댔습니다.(245쪽, 이서수, 「몸과 무경계 지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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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저는 혼란 속에서 과거와 연결되기도 하고 주위에 감응하여 확장되기도 하며, 가끔은 볼품없이 축소되고 부정당하는 자아를 견디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아버지, 여기는 서울입니다.(289쪽, 전춘화, 「여기는 서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