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9. 2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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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내가 가족들에게 감내한 시간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혹은 모른 척 한 채), 나를 생각한답시고 내뱉는 말들은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뿐이고. 이런 시답잖은 말들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이 공간밖에 터놓을 곳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플 뿐이고. 가족이란 무엇인가.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존재란… 이래저래 심란한 추석을 보내고 있다.(2024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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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종일 나의 이상스런 기분과 괴로움의 이유를 지금에야 알았다. 마당에 나가 보고. 교교하다. 만월(滿月) 때 내게 오는 달병病, Mond krankheit. - 전혜린

 

오늘 종일 나의 이상스런 기분과 괴로움의 이유가 단지 달병病이었으면!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지만 그래도 밤에 절뚝거리며 나간 짧은 산책 동안 만월을 보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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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타인을 너무 배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도 전혀 바라지 않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런 배려 말이다. 어쩌면 이건 나의 병인지도. 누군가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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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특히 경탄할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풍경들, 사물들)을 볼 때면 이제 AI로 작업한 건 아닌지 일단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림과 사진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면 이제는 AI 작업물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미 하고 있겠지만.(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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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계속되는 폭염경보 속에서.(202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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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을 쓴다. 글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그저 중얼거림을.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짧은 문장 몇 개가 이어져 하나의 문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분절된 문장들이 짧고 길게 이어진다. 글을 쓰다 보면 사라질 언어들을 보이는 문자로 바꾸어 허공에 흩뿌리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냥 사라지게 놔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를. 하지만 내 안의 어떤 열망(?)이, 어떤 흔들림이, 어떤 불안이, 어떤 패배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마치 동굴 속 돌의 울음처럼 내 안의 무엇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다.(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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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사가 왜 이리 늦될까. 늘 꾸물거리고, 유예하고,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게으른 걸까. 왜 그런 걸까. 나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2024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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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놓은 세상이 불과 몇 초만에 달리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서서히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씽크홀처럼 갑작스럽게 구덩이 속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걸.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삶이, 순식간에.(2024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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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asked, "Why do you always wear black?, " he said, "I am mourning for my life.” ― Anton Chekhov

 

오래전에 내게 체호프의 단편선을 선물로 주었던 이가 생각난다. 그는 체호프가 한 저 말을 알고 있었을까? 책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하얗습니다'(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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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손목 시계를 어디 뒀더라... 찾았다! 학창 시절 노상 차고 다녔는데, 갑자기 다시 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산책할 때 만이라도... 핸드폰 대신 찰 생각이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혹시라도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울까? 여전히 생각이 많다.(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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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이 희망이라면, 어떤 희망을 말하는 걸까? 그저 절망이 아닌 것을 희망이라 말할 수 있나.(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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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로 몇 해더라? 지금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구나. 마치 아주 먼 나라의 영화제처럼.(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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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이나 인테리어 관련 사진을 보다 보면, 건물의 구조나 형태, 재질, 배치, 색감 등도 중요하지만, 나는 어쩐지 건물의 안과 밖에 놓여 있는 식물들에 눈길이 더 간다.(202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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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까치 군단이 몰려왔나. 까치 소리가 맹렬하다.(20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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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긴 오나보다. 동네 이곳저곳에서 가을맞이 소규모 행사들이 주말을 맞아 연이어 열리고 있다. 산책길이 시끌벅적하구나. 고맙게도 바람이 시원하다. 혹시나 싶어 들고 온 책을 조금 읽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 이 책이 그의 마지막 책이라고 쓰여있다. 나는 그게 지금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잠시 생각했다. 어느새 해가 많이 짧아졌다. 어둠이, 아직은 녹색으로 가득한 숲에 음영을 드리운다. 가야 할 시간이구나.(20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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