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퇴라는 것은 물론, 필요에 의해서, 내게 허락된 시간을 조직의 허락을 받고 쓰는 일이지만, 그것의 가장 좋은 점이 조퇴하는 그 순간일 뿐이라는 건 좀 슬픈 일이다. 조퇴한 후의 시간과 정식 퇴근 후의 시간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그러니까 몇 시간 일찍 사무실을 나온다고 해도 퇴근 후의 남은 시간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하긴, 고작 몇 시간 가지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겠냐마는. 그냥 그 시간이 아니면 하기 힘든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화창한 봄날, 벚꽃이 필 때나 가을 지나 첫눈이 내릴 때 조퇴하지 않는다면 생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이나 작가의 낭독회, 흔히 볼 수 없는 화가의 전시회 같은 것을 지금 보지 않는다면. 아무 이유 없이(물론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멀리 있는 사촌이나, 소식이 뜸했던 옛 친구의 얼굴이 보고 싶어 진다면. 내 마음이 동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기다려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지 않은가.
갑자기 조퇴할 때면 사람들은 묻는다(물론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사적인 일이니 굳이 물어보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왜, 무슨 일 있어? 나는 굳이 무슨 일이 있어야 조퇴를 쓸 수 있냐고 반문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무슨 일이 있다. 있고말고!
창밖을 봐, 첫눈이 오고 있잖아!
이건, 첫눈이 오는 날 조퇴를 하고 말 것이라는 내 다짐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서 첫눈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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