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11. 3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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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엄연히 생을 부여받아 존재했던 어떤 종이 남김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인간의 과도한 사냥에 의해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멸종, 절멸을? 정말이지 끔찍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되는.(20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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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불러서 식사 자리에 갔는데 모르는 사람이 함께 와 있을 때의 어색함이란. 그 모르는 사람이 실은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모드로 돌입해야 한다는 사실의 피곤함이란. 사실 내가 그의 말을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과 지루함이란.(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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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고기는 이제 그만! 어째 사람들과 만나기만 하면 고기를 먹게 되는 것인지. 내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돼지고기를 하루에 두 끼 먹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로구나.(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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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퇴근하고 집에 오면 멍하니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에 걸려버렸나.(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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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중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냉장고에서 일주일 넘게 숙성된 레몬 한 봉지를 꺼내 바득바득 씻고 얇게 자른 후 설탕에 버무려 놓았다. 레몬 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맴돈다. 레몬 향기가 나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20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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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겨울 느낌이 물씬 난다. 차가워진 공기도 그렇지만, 주위의 풍경들이 이제는 슬슬 겨울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조심스레 말하는 듯하다. 때가 되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안 그래도 아쉬운 가을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아 많이 아쉽다.(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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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에서 건, 기분이 상했다면 상한 거니까. 나는 정말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이 상대에게는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까. 그건 내 잘못이니까. 나는 성급히 말을 뱉고, 후회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미처 하지 못했으니까.(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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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재앙이 닥쳐오기 전에는 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전조 증상이 있다고 하지. 우리 삶의 소소한 기쁨들은 모두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되는 커다란 상실의 슬픔을 위한 전조 증상이 아닐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그런데 소소한 기쁨이 없다면 커다란 상실의 슬픔도 없는 것일까? 나는 아직 오지 않는 슬픔의 예감만으로도 이미 슬픈데... 당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 많이 기뻐하고 많이 슬퍼하면 된다고, 겁먹지 말라고, 어떤 목소리가 나를, 그렇게라도 나에게.(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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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꿈이 현실을 침범한 것인지 현실이 꿈을 침범한 것인지. 혹은, 사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생각한 것보다 그리 명확하지 않은 것인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어떤 일이 꿈에서인지 현실에서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떤 일이.(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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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도 더 전에, 내게 책을 선물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것 같아서 주고 싶었다고. 그런 그를 얼마 전 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보았다. 그는 나를 알아볼까? 궁금했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보일락 말락 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일부러 바라보지 않았으므로.

 

집에 와 그가 준 책을 찾아보니 없었다. 그 책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몇 번의 이사를 하는 사이 실수로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여태껏 받지 못한 것일까? 기억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어쩌면 그는 내게 책을 주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한 때 그 책이 내게 있었다는 사실을 그를 보고 나서야 겨우 생각해 냈으니까.(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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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면 분량을 맞추기가 참 힘들다. 혼자 기분 내켜서 쓰는 글이라면 분량이 다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300자 정도로 맞추려고 했는데 600자가 넘어버려서, "너무 길죠?"라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 "그래도 읽을 사람은 다 읽어요."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 나는 '그래도 읽을 사람'에 속하는가 아니면 '어차피 읽지 않을 사람'에 속하는가.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무슨 작가라도 된 것 같네. 하하.(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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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첫눈은 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소녀 같았는데, 올해의 첫눈은 변화무쌍하면서도 힘찬 장군 같았다. 출근을 하자마자 눈이 왔으나, 비가 섞인 눈이어서인지 지상에 닿자마자 녹아버렸다. 애석하게도 조퇴를 하리라는 다짐은 이루지 못했지만, 일터에서 바라보는 설경도 나쁘지 않았다.(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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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읽히지 않을 때는 짧은 시 한 편이라도 읽기. 시 한 편이라도? 시가 소설에 비해 짧다고 해서 쉽게 읽을 수 있던가? 이것은 분명 시에 대한 모독이다. 또다시 괴로움. 그러니까 딴생각 말고 몇 시간 전부터 현관 앞에 놔둔 쓰레기나 버리러 갔다 왔어야 했다.(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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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퇴고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글을 고치면 고칠수록 처음 내가 생각했던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빠져나가 버리는 것'과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은 다르지 않느냐는 말이다. 뭔가 변명 같긴 하다만. 뭔가 빼거나 더할수록 원래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원래 내가 생각했던 건 또 뭘까?(20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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