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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을 따라 산책을 했다. 점심시간에 누리는 아주 짧은 사치.(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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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삶은 우리를 돌멩이처럼 허공으로 던져버렸는데, 날아가면서 우리가 말하는 것이다. "봐, 내가 내 힘으로 나가고 있잖아."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우리는 추락하는 중이며, 누구나 추락할 운명을 타고났다. 태어났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날아가는 중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20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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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 어둠이 스며있는, 어둠에 물들어가는 그런 풍경들, 사진들에 눈길이 머문다. 어둠은 비밀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20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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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정 시상식에서 한강의 수상 소감을 듣는다. 그는 자신을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런 말을 종종 듣는 사람이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그 말이 반가웠다. 앞으로 나올 세 권의(몇 권이 될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소설 역시 궁금했다.(20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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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말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너무 많은 각색과, 미화, 과장과 축소를 하고 말았다. 나 스스로 말을 내뱉으면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오해의 언어들. 언젠가 내 목을 조를지도 모를.(20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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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의 느낌은 웬만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를 오래 겪다 보면 처음 느꼈던 인상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와 달리 나는 누군가의 첫인상이란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감추기 위해 오래도록 단련한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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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집에서 혼자 쉬는 것이 왜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타인과의 연애만이 인생을 즐기는 유일한 낙이란 말인가? 맙소사!
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즐기세요. 당신의 파트너와 함께. 다만 당신이 즐기는 것들을 나에게 강요하지는 마세요. 제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랍니다. 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리고 우리 서로 상상력을 키워봐요. 인생을 즐기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겠어요?(202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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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CD를 모아놓은 서랍장을 열었는데, 처음 보는 CD가 수두룩하다. 확실한 건 분명 내가 구입했다는 사실인데...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걸로 집어 플레이어에 넣는다. 그리고 조용히 듣는다. 빨래를 널면서.(201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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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7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 거기 그런 게 있었단 말이야? 원주의 유명한 은행나무는 들어봤어도 지척에 그와 비슷한 은행나무가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 지금껏 내가 몰랐다는 사실이.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꼭 가보리라 다짐했다.(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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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스스로 괴로움의 무덤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하고자 했으면 하면 될 것이요, 하지 않겠다 했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련만, 하고자 했으나 하지 않고, 하루종일 하고자 한 일에 대해서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있으니, 어리석다 할밖에.(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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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는 것 아니라 '서랍에 마음을 넣어' 둘 수 있다면. 번잡한 마음을 좀 넣어 두었다가 때가 되면 다시 꺼내서 쓸 수 있다면.(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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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게 놔두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처절히 깨닫기 전까지는.(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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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늘 하고 싶은 말보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는 후회를 하지.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은 신기할 정도로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 결국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어지지.(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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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저도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을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 오늘은 누군가 내게 한 말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지금까지도.(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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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 말을 들었다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 말을 못 들었다 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한 것 같은데,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말을 듣거나 듣지 못한 사람들은 서로 영문을 모른 채 각자 자기가 듣거나 듣지 못한 말만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진행되었는데, K는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나, 그것이 그곳의 생태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밝혀낼 의지도 없고, 이유도 없는, 일단 누군가의 말이면 아무리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지는 그런 세계를.(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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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카프카적이라고 해야 할까, 까뮈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상하지만, 이상하다고만 말하기에는 한참 부족한.(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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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의 진동벨이 울릴 때는 알아채지 못하고, 진동벨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울리는 줄 알고 화들짝 놀라는 증상을 앓고 있다.(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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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라는 건, 어쨌든 지금껏 삶을 견뎌냈다는데 대한 축하인 걸까. 아직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사의 축하인 걸까.(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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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주말의 영화였나, 토요명화였나, 암튼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 프로그램의 오프닝 음악으로 아랑훼즈 협주곡이 나왔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음악인 줄도 모르면서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던지, 지금 들으면 그때 생각이 나면서 아득한 감정에 빠진다. 미지의 장대한 서사시가 펼쳐질 것 같은.
어제 문득 아랑훼즈 협주곡이 떠올랐는데, 오늘 자고 일어나 유튜브를 보니,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박규희라는 기타리스트가 협연한 아랑훼즈 협주곡이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홀린 듯 공연을 감상했다. 신기한 기분.(202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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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을 찾으러 이곳에 왔지.
- 임유영, 「빗금」 중에서
오늘이 딱 그런 날. 일어났는데 아침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회색빛의 세상 속에서.(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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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과연 적절한 일일까. 나는 이곳에 인상적이었던 시구들을 자주 올리지만, 매번 그것이 적절한 일인가 고민한다. 소설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시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벗어난다면 오독의 여지가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것이 시 한 편의 완전한 얼굴과 만나게 하는 접점 역할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 인용한 시의 한 구절로 인해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 것인가.(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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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녕이라고 말했는데, 생각해 보니 시월의 마지막 밤은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 나는 왜 오늘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쉬울수록 더 빨리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라는 게 있는 걸까. 정말 그런 걸까.(202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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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레몬 안에 든 씨를 심어 키워봤다고 했다. 어떤 나무의 씨를 직접 발아시켜 2년 정도 키웠다고 했다. 나는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작은 씨앗 안에 생명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 모든 가능성들이 기능적으로 버려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202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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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때 안녕과 헤어질 때의 안녕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굴을 보았을까. 시작과 끝에 우리는 늘 안부를 물었지. 이젠 정말 안녕, 시월의 마지막 밤이야.(202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