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12. 1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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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는 트윗을 보았다. 아마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그의 의문이 순수하면 할수록(설사 어떤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이 사회는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좋은' 대학이란 무엇이며,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딱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못이 언다고 오리들이 얼거나 굶어 죽는 것은 아니듯, 좋은 대학을 못 간다고 그 사람들의 인생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인생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갈 뿐이니까. 세상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내가 보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으니까.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세상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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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주가 별로 없지만, 뒷북치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다. 좋게 말해 유행을 쫓아가지 않고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말해 화제가 되는 이슈에는 참여하지 못하고(가 아니라 '안'하는 게 맞겠지만) 결국 망해가는 것들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혼잣말을 하게 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한때 흥했던 모든 것들의 말로를 지켜보는 자라고 해야 할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다.(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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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보니,

벌써,

12월이라고.(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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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이가 없으면 말이 잘 안 나오는구나.(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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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무척 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기도 하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도 큰 감정의 격랑을 겪은 탓이리라.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공포가 영혼을 엄습한다. 처단한다는 단어가 가진 무자비함과 잔인함, 그 암흑과 공포가 여전히 나를 짓누른다.(20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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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약한 것이었나.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나.(20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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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려고 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말은 틀렸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물며 오해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해와 오해를 넘어서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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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에 취할 수도 있구나. 나는 어제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피곤에 취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고, 웃을 일도 아닌데 실실 웃었으며, 갑작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나기도 했고, 분노에 차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했다. 아, 가만 생각해 보니 그건 술에 취한 내 모습이 아니었구나. 그건 정말 피곤에 취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피로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스트레스는, 그 분노는, 그 참담함은. 무엇이 내 안의 심연을 건드린 것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내가. 철저히 혼자인 내가.(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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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모여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벅찬 일일 수 있는지.(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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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양심적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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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읽어야 하나, 아니, 무엇을 읽을 수 있나.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세상에서, 아니 아무것도 읽고 싶어지지 않는 세상에서. 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이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늘 핑계를 찾는 일에만 골몰했다는 것을. 하지만 어쩌랴, 당분간 나는 이 거대한 핑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202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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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어처구니없는 계엄 사태가 공존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정신이 아찔하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역사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뉴스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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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렇게 뉴스를 많이 보던 때가 세월호 이후 처음이 아닌가.(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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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혼자, 골방에서,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고독을 친구 삼아, 배수아와 페소아를,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제발트를, 리스펙토르와 로베르트 발저를, 그 다양한 몽상의 세계를 유영하는 것뿐인데.(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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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을 하길래 냅다 수동 커피 그라인더와 원두를 샀는데, 아침마다 힘겹게 그라인더를 드륵드륵 갈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습다가도, 출근을 해서 마실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그런다. 텀블러에 담아 간 커피를 퇴근 때까지 마시고 있으니, 하루종일 입속에서 커피 향이 가시지 않는다.(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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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 다 드러난 줄 알았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처참한 바닥이 드러나 보일줄이야. 그 끝은 어디인가? 기가 막힌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자의 비뚤어진 신념이 무섭다.(202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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