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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쿠키를 먹기 위해 커피를 내렸다. 오로지 책을 읽기 위해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오로지 휴일을 위해 휴일을 보냈다. 오로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유월이 되었다.(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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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고 있다. 여름의 초입에 압도적인 눈의 이미지로 가득한 이 소설을 읽고 있으니, 나 역시 소설 속 경하처럼 현실인지 꿈인지,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시공간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눈과 새와 피의 이미지가 한데 얽혀 눈앞에 어른거린다.(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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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자고 일어나 슬슬 마실 가듯 투표장으로 향했다. 투표장은 내 집 바로 옆에 있는 학교였다. 점심 전이었는데 사람들이 꽤 있었다. 기억하고 있던 내 번호를 말하고, 본인 확인을 하고, 서명을 한 후, 투표용지를 받았다. 기표도장을 찍고 혹시나 싶어 후후 불어서 말린 후 용지를 두 번 접었다. 어쩐지 조금 간절한 마음이 되었다.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구나. 오늘 내 할 일은 다 했다. 배가 고프다. 점심을 먹어야겠다.(2025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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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책장에 꽂혀 있는 소설을 꺼내 첫 문장을 읽어볼 때가 있고, 마지막 문장을 읽어볼 때가 있다. 첫 문장이 궁금해지는 것과 마지막 문장이 궁금해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부질없는 궁금증이 일고. 아직 읽지 않은 소설은 첫 문장이, 한 번이라도 읽은 소설은 마지막 문장이 궁금해지는 걸까?(2025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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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 실처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이 두통이 언제 끝날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무언가를 매듭짓기 전까지 아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삶이란 살아 있는 동안의 끝없는 매듭짓기인 걸까.(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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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아래 앉아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버스킹을 하는지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소라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였다. 초여름에 듣는 이소라의 노래도 참 좋구나 생각했다.(202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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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뒤의 평화 같은 시간. 격렬하게 끓어오르던, 암울했던 감정들은 다 무엇이었나. 나무 그늘 아래 햇살 조각이 바람에 흩날리고. 쉼 없이, 살랑살랑, 부드럽게 피부에 와닿는 바람이 마치 이불처럼 느껴진다. 나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이불을 덮고 나무 그늘 아래 반쯤 누운 채 눈을 감는다. 옅은 잠 속으로 스르륵 빠져든다.(202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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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장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야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왜 어떤 이들은 스스로 판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왜 어떤 이들은 상처를 주지도 않았는데 받고, 받지도 않았는데 주는 걸까. 왜 어떤 이들은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걸까. 갑작스러운 네 말에 우리 모두는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지. 그게 왜 너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지, 그게 왜 너를 소외시키는 일인지, 그게 왜 너를 무시하는 일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아니, 무엇이, 어떻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202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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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질투일까, 자격지심일까, 피해의식일까? 아님 그 모든 것일까? 나 역시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더욱 감정적인 사람과의 대화는 참 힘이 든다. 반대로, 감정적이지 않은,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화 역시도 참 힘이 든다.(202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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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름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수상하게도 올해 오월은 선선했으니. 잊고 있던 더위가 다시 찾아왔구나. 늘 그랬듯 이 더위도 무사히 잘 지나가기를. 잊고 있던 서늘함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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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있는데 이런 문장이 나온다. '갈등 자체를 회피하면서 자기만의 성에 고립된 채 무해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들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어쩐지 나는 이 문장이 쉬 잊히지 않았다. 나에게 고통이란 무엇인지.(20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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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더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경우가 많다. 지극히 감정적인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매몰된 사람들이니까. 타인의 감정 따위는 헤아리지 않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감정이니까.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자신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 기어코 파괴하고 만다.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가능한가? 그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나는 점차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202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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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절이 완연해지는 시기가 오면, 작년 이맘때의 기억은 전혀 나지 않고, 오로지 내 몸이 이 계절의 완연함에 반응하고 있음을 느낀다. 마치 그래야만 이 계절을 살아낼 수 있는 것처럼.(202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