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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은' 지나간다. 내 삶의 월요일 하나가. 애정과 증오의 월요일 하나가.(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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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녹색이 파도처럼 쏟아질 것이다.
나는 늘 녹색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연두색이랄까, 옅은 녹색이 아니라 아주 진한 녹색, 검은색에 뿌리를 둔 녹색에 대해서. 어둠으로써의 녹색 혹은 녹색의 어둠, 그 침묵에 대해서. 하지만 나는 늘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다. 이제 곧 도래할 녹색으로 가득한 침묵의 세계에 대해서.(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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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이고, 쏟아지는 것은 폭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쏟아진다는 말이 떠올랐는데, 왜 폭포가 아니라 파도가 생각났을까. 뭐, 아무렴 어떠냐마는.(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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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무료 나눔 한 책을 왕창 가져다 놓아서, 한동안 책은 사지 않겠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강의 신작이 나왔으니. 하지만 그것만 산 것은 물론 아니다. 방안에 읽지 않은 책들이 쌓여간다. 하지만 기분은 좋다. 띠지로 책갈피를 만드는 것 역시 소소한 즐거움이다.(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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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서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책을 보는 - 책의 제목이나 표지, 크기, 두께와 디자인 같은 -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즐거움을 준다. 우리는 우선 책을 본다. 그리고 읽는다.(책 표지의 제목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아이였을 때, 나는 책의 제목만 보고 그 책의 내용을 상상했다. 책의 내면(내용)이 아니라 책의 외면(제목이나 표지의 그림)을 먼저 본 것이다. 내 최초의 책은 그렇게 다가왔다. 일단 보는 것으로, 그다음 읽는 것으로.(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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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5월이 되었네. 탁상 달력 한 장을 넘긴다. 뭐가 적혀 있는 게 많다. 5월은 기억의 달이로구나.(202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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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의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이전에 보았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생각이 안 나서 혼났다.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처럼. 요즘 그런 일들이 잦다. 대화 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그거 있잖아 왜, 그거!라고 말하는 것이다.(202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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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풀 군락지를 지날 때면, 내 눈은 왜 자동적으로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는 것인지. 행운이란 찾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일 텐데.(202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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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끝나고 나올 때는 걸을 힘이 나질 않았는데, 시원한 바람을 쐬고 나니 좀 더 걸을 마음이 생겼고, 마음이 생기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이제 곧 있으면 덥다고 난리를 칠 테니, 지금 부는 선선한 바람을 즐겨야겠지.(202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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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을 샀는데, 사장님이 서비스로 카네이션 화분 한 개를 더 주셨다. 나는 놀란 눈으로, 이걸 그냥 주신다고요? 물었고, 사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다고 말했다. 내가 산 것은 향이 없는데 이 카네이션은 향이 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말 향이 코끝에 전해졌다. 얼떨떨한 기분과 함께. 내가 산 카네이션은 아버지께 드리고, 덤으로 얻은 카네이션은 지금 내 집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작은 도자기 화분에 옮겨 심고 물을 주었다. 은은한 향기가 거실에 퍼진다. 어쩐지 꽃집에서 가져올 때보다 꽃이 더 핀 것 같다. 덕분에 거실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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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제법 크고 함박눈처럼 하얗고 탐스럽게 꽃을 피운 이팝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산 아래 집들이 늘어선 가운데 홀로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마치 산신령이 나무로 현현한 듯, 그것은 나무지만 나무가 아닌 무엇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이팝나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202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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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立夏)가 지났다는 문장을 보고 언제였나 찾아보니 5월 5일이었다. 입춘이나 입추는 뚜렷이 인식되곤 하는데 입하나 입동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어떤 기다림 혹은 간절함의 차이 때문일까. 분명 여름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에게는 입하가 특별히 다가올 테지. 그나저나 24개나 되는 절기는 매번 놀랍기만 하다.(202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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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기를 때는 오직 그들이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나와 상호작용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농담도 위트도 감사도 따뜻한 말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 한강, '정원 일기' 중에서(《빛과 실》 수록)
그냥 잘 있어만 주기를. 어디 식물을 기를 때만 그럴까.(2025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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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자리 동료가 출근 인사를 건네는데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무슨 향수인지 궁금했지만, 향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는 그저 향수를 뿌렸겠거니 하고 말았는데, 퇴근을 하고 건물 밖을 나오자마자 알았다. 그것은 아카시아 향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카시아 향수라는 게 있는 걸까? 그가 정말 아카시아 향수를 뿌린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아카시아 향이 그에게 실려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눈으로 깨닫게 되는 벚꽃과는 달리 아카시아꽃은 코로 먼저 알게 된다.(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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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향기에 취한 것일까? 멍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상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어 부랴부랴 일을 처리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아카시아 향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겠지만. 스스로를 탓하기는 싫지만 요즘의 나는 내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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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타인의 삶이 부러워지는 건 확실히 좋은 징조는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내 삶이 견디기 힘들다는 뜻일 테니까. SNS가 보여주는 타인의 일상은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그것도 아주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만을 선별하여 보여줄 뿐이라는 걸(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알면서도, 지금 내가 어떤 이들의 삶을 몹시도 부러워하고 있다면, 무엇을 하든 고충은 있고, 나아가 고통 없는 삶은 없다는 평소의 생각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니까. 내가 내 삶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뜻일 테니까. 이건 왜 나이가 들수록 나아지지 않는 걸까.(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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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냉장고에 있는 걸로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멍하니 있다 보니 시간이 흘렀고, 결국 배달을 시키고 말았다. 퇴근 후의 시간은 왜 이리도 순식간에 사라지는가!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다.(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