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는 하늘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바다에는 마치 헝겊에 주름이 잡힌 듯 약간 접힌 자국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이 희어지자 서서히 수평선 위에 검은 선이 그어지면서 바다와 하늘은 갈라지고, 수면 밑에서 차례로 하니씩 끊임없이 서로를 뒤쫓으며 밀려드는 시커먼 파도로 인해 회색빛 바다에는 줄무늬가 생겨나고 있었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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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흩어놓자 하얀 구름 빛이 옅어진다. 저 푸름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수 있다면, 저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영원히 이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이 순간이 영원히 머무를 수만 있다면―(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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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는 폭풍우가 인다. 밤나무 가지가 요동을 치고 있다. 가지와 가지 사이에 별이 번뜩인다. 어떤 선과 악의 거대한 힘이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단 말인가?(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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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 장씩 떼어내는 일력에서 오월과 유월 달을 전부 떼어내었어," 수잔이 말했다. "칠월도 20일까지는 떼어냈어. 떼어내서 똘똘 뭉쳤어.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지, 단지 내 옆구리를 짓누르고 있을 뿐이야..."(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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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둠과 잠과 밤을 싫어해," 지니가 말했다. "그래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누워 있어. 일주일이 아무 구분 없이 하루가 되었으면 해. 잠이 일찍 깼을 때는―주로 새소리가 잠을 깨우는데―누운 채로 식기 찬장의 놋쇠 손잡이가 점점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을 지켜보지..."(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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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또 하루가 시작되네, 또 하루가, 발이 마룻바닥에 닿자 나는 울부짖는다. 상처투성이의 하루, 불완전한 하루일지도 모른다. 나는 자주 꾸중을 들으니까. 게으름을 피워서, 웃어서 벌을 받지.(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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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閱兵) 중인 선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연인들도. 해안을 따라 버스가 마을 쪽으로 덜덜거리고 간다. 나는 줄 것이다, 장식할 거다. 이 아름다움을 세상에 되돌려줄 거야. 꽃을 묶어 화환을 만들어 손을 뻗치고 앞으로 나아가 바칠 것이다―아아! 도대체 그 누구에게?(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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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고 격렬한 천둥이 울린다. 어느 날 밤에는 구름을 뚫고 별이 흐르고, 그러면 나는 별에게 기도한다. '나를 완전히 소진시켜 달라'고, 그건 한여름의 일이었어.(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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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 인간은 무(無)라고 말하고 나는 넘어졌어. 깃털같이 훅 불려서 터널 안을 표류하고 있었어. 그러고 나서 매우 신중하게 발을 내밀었어, 벽돌로 된 벽에 손을 얹고. 섬뜩한 회색빛 물웅덩이를 넘어 나 자신을 다시 내 육체 안으로 끌어당겨 넣으면서 대단히 고통스럽게 나는 돌아왔다. 이것이 내 몸을 위탁한 인생이라는 거야.(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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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맑은 아침 공기 가운데서 경쟁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느티나무 위로 높다랗게 날아돌면서 함께 노래 부르고 서로를 쫓고 쫓기고 쪼아댄다. 드디어 쫓고 쫓기는 비상에 싫증을 느끼고는 아름답게 내려왔다. 정교하게 몸을 굽히고 조용히 나무에, 벽에 내려앉았다. 머리를 사방으로 돌리면서, 빛나는 눈으로 흘끔거리면서.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한 가지, 특별한 한 가지 일을 강렬하게 의식하면서.(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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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 읽어볼까. 아니야, 이건 재미없어. 이건 산만해. 이건 약간 지나치게 형식적이야. 이제 감이 잡혀. 자, 그의 박자가 내 머릿속에 들어오고 있어(문장의 핵심은 리듬이니까). 자, 쉬지 않고 시작할 거야. 밝고 쾌활한 필치로―
하지만 벌렁 넘어지고 말아. 필력은 소진되지. 이 변모를 이겨낼 힘이 없어. 가짜 나에게서 진정한 나 자신이 떠나버려.(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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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에서 자아낸 실이 서로의 사이에 있는 세계의 뿌연 공간을 가로질러 그 가느다란 실을 길게 늘이고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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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 문에 기대어 세터 종의 개가 원을 그리면서 냄새를 맡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때때로 생각하지(나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어). 나는 여자가 아니라 이 문 위에, 이 지면 위에, 내리쪼이는 빛이 아닌가 하고. 나는 다양한 계절이라고 생각해, 일월, 오월, 아니면 십일월이라고, 진흙, 안개, 여명이라고.(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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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위 끝 가장자리를 말끔히 청소한 듯 하얀색으로 채우는 거품인 것을.(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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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예리한 쐐기 모양으로 실내에 뇌리쬐었다. 빛이 닿은 것은 그 어느 것이나 강렬한 삶을 부여받았다. 접시는 하얀 조수 같았고, 나이프는 얼음 단검으로 변했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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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무언가 의미가 있다고, 도대체 누가 감히 말을 할 수 있는가? 언어의 비상을 그 누가 예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나무 꼭대기 위로 날아가는 풍선인 것을. 지식을 입에 올리는 것은 무모하다. 모든 것이 실험이고 모험인 것을. 우리는 무수히 많은 미지의 것들과 끊임없이 섞이고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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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순간은 모두 난폭하고, 모두 분리되 것이야. 만약 내가 순간적인 도약의 충격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너희는 나를 덮쳐 발기발기 찢어놓을 거야. 내게는 목적이 없어. 일 분 일 분을, 한 시간 한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 하고, 그 어떤 자연의 힘에 의해 분과 시간을 해결해서, 너희가 소위 인생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온전하고 분리 불가능한 것이 될 때까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너희에게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 그 목적이 옆에 있고 앉고 싶은 한 사람일까, 어떤 사상일까, 자신의 아름다움일까? 나는 모른다 ― 너희의 날들과 시간들은 나뭇가지같이, 매끈한 초록 승마도로같이 냄새로 추적하는 사냥개에게로 뻗어 있다. 하지만 내게는 따라갈 냄새도 전혀 없고, 사람도 없어. 내게는 얼굴도 없어. 나는 해안 위를 달리는 거품, 아니면 양철 깡통 위에 화살처럼 떨어지는 달빛, 갑옷을 입은 씨-할리 위에 떨어지는 거품이야. 아니면 하나의 뼈다귀, 그것도 아니면 반쯤 부식된 보트이다.(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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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는 사랑, 미움, 분노, 그리고 고통의 절규. 이 이야기는 늙은 여인에게서 신체의 일부같이 되어버린 듯한 옷을 벗기는 것과 같아... 나는 평범한 행복밖에는 모를 거야. 그것으로 거의 만족할 거야. 지쳐서 잠자리에 들게 될 거고, 되풀이해서 곡식을 키우는 밭처럼 누워 있을 거야. 여름이면 더위가 내 위에서 춤을 출 것이고, 겨울이 되면 추워서 피부가 갈라지겠지. 그러나 더위나 추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연히 돌아오지. 아이들이 나를 도와주겠지. 아이들의 이가 나오고, 울고, 학교에 갔다 오는 것이 파도같이 나를 움직이게 하겠지. 파도가 움직이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겠지.(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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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다양하고, 타인의 사상과 웃음을 몇백만 번이라도 즐기는 반면에 나는 실쭉하고, 폭풍우빛이고 화가 나서 안색이 벌겋게 될 테지. 아름다운 동물적 모성애로 인해 품격이 떨어지고 편협해지겠지. 신중하지 못하게 아이들을 출세시키려고 할 테지. 아이들의 결점을 보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도우려고 야비한 거짓말도 할 테지. 아이들이라는 장벽 때문에 너도, 너도, 또 너도 가까이하지 않을 거야. 또한 나는 질투로 갈기갈기 찢어졌어. 지니는 나의 양손이 새빨같고 손톱을 물어뜯는 흔적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미워. 나는 그렇게나 격렬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도망갈 수 있다는 한마디에 죽을 정도로 충격을 받아. 그가 도망을 치고 나는 나무 꼭대기에 있는 이파리들 가운데서 들락날락하는 줄을 움켜쥐고 있어. 문학은 이해 못해.(139~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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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함성을 지르고 있어.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야. 하지만 용기를 내서 가볼 거야. 가서 나의 공허를 재충전하고 나의 밤을 잡아 늘여서 꿈으로 가득가득 채울 테야. 그러면 일순간은 지금 여기서도 나는 목적을 달성하고 이렇게 말할 거야. '더 이상 방황하지 마. 다른 것은 모두 실험이고 위선이야. 여기가 목적지야.'라고.(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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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갑판 위를 걷는다. 그녀의 주위에서는 개가 짖고 있다. 그녀의 치마는 바람에 날리고 머리칼도 바람에 날린다. 바다로 나가는군. 우리를 떠나고 있어. 이 여름날 저녁에 사라지고 있어. 버리자, 느슨하게 풀자. 지금이야말로 억압된 욕망, 끌어당겼던 욕망을 드디어 풀어주자, 쓰이고 소모되도록.(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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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지만 경계 따위는 바람에 날려보내고, 문이 열리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이따금 울어라, 또한 용서 없이 숯 검댕 한 조각과, 나무껍질, 모든 종류의 단단한 부착물을 잘라버려라. 그리하여(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망을 깊이, 더 깊이 내려 그와 그녀가 한 말을 끌어당겨 수면으로 가져와 시를 만들자.(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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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감동의 시간이 지나 고요해지기 전에 지금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지금 어렵사리 만난 오랜 친구들에게 어울리게 솔직 담백하게 말해, 우리는 만나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건 서글픔인 것을. 문은 열리지 않고,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슬픔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중년이 되어 많은 짐을 지고 있다. 우리의 짐을 내려놓자. 네 인생은 어떠했느냐고, 우리는 묻노라, 그리고 나의 인생은?(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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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사랑이 어떻게 화염이 되는가도 알고, 질투가 어떻게 초록 화살을 여기저기 방사하는가도 안다, 또한 사랑과 사랑이 어떻게 복잡하게 교차하는가도. 사랑은 매듭을 만들고 잔혹하게 그들을 찢어놓는다. 나는 동여매졌다. 나는 찢어졌다.(228~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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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행복할 때는 역시 혼자 있을 때이다.(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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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결코 볼 수 없는 최초의 아침을 보았다 ― 참새들은 어린애가 매달아놓은 장난감 같았다. 바깥에서 애정 없이 사물을 바라다보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은 ― 얼마나 신비한가!(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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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도 파도가 일어선다. 부풀어오르고 등을 구부린다. 나는 다시 한번 새로운 욕망을, 기수가 처음에 박차를 가하고는 뒤로 잡아끄는 자존심이 강한 말같이 내 밑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것을 느낀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너, 우리가 이 보도를 발길질하며 서 있을 때 어떤 적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끼는가?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이 적이다. 내가 창을 공격태세로 꼬나잡고 젊은 사람처럼, 인도에서 말을 타고 달렸을 때의 퍼시벌처럼 나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죽음에 맞서서 말을 타고 돌진한다. 말에 박차를 가한다.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311쪽)
*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312쪽)
*
어찌하여 이 작품이 이토록 특이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는가에 관해 생각해보아야겠다. 해답은 이 작품이 우리의 머리나 가슴이 아니라 영혼을 담아내고자 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27쪽,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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