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안도현,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 몰개, 2025.

시월의숲 2025. 8. 9. 18:54

스무 살 무렵이었나. 아무한테도 휘둘리지 않고 고요하고 자유롭게 살다가 그렇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거창하다면 거창하고 허황하다면 허황한 꿈이었다.(4쪽)

 

 

*

 

 

내가 선택해서 입는 모든 옷은

내 몸을 찾아온 옷이다.

멀리서 나를 방문한 손님 같은 옷.

 

나한테 와서 옷은

나 자신이 된다.

 

그때부터 나는 옷과 함께 외출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옷과 함께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다.(7~8쪽)

 

 

*

 

 

붉게 이지러진 살갗 사이

신기하게도 노란 살이

동백꽃의 꽃수술처럼

볼록하게 돋아 있었다.

동백꽃이 아, 하고 입을 벌리면

그 붉은 목구멍 속에

노란 목젖이 보이는 것처럼.(64~65쪽)

 

 

*

 

 

영원은 끝없이 이어진 길의 마지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퉁이를 도는 순간마다 누적된다는 것을.

영원은 자를 잴 수 있는 길이가 아니라

순간의 깊이이므로.(86쪽)

 

 

*

 

 

정말로,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옷과 피부 사이의 틈,

그 허공을 걷어내고 싶어 한다.(105쪽)

 

 

*

 

 

옷은 그러니까

몸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입이 없는 몸이

노래를 하는 그 찰나가

바로 옷이다.(125쪽)

 

 

*

 

 

무조건적인 결합을 고집하는 것보다 분리의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 지혜로울 수도 있다. 모든 걸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강박은 때로 고통을 재생산할 뿐이다. 결합은 이상주의자들이 자주 내세우는 상투적인 테제다. 그럴싸해 보이고 번지르르한 말들에 취한 자들은 이별을 두려워한다.

 

결별이 섬을 만든다.

간격이 독립을 생산한다.(147쪽)

 

 

*

 

 

말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이 세계에는 이야기가 태어난다.(150쪽)

 

 

*

 

 

"살아보니까 행복이 별난 게 아니더라. 바쁘고 화려하게 살 때는 외로워할 틈이 없었어. 나는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 때가 참 좋았어. 적당히 외로울 때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