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는 하늘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바다에는 마치 헝겊에 주름이 잡힌 듯 약간 접힌 자국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이 희어지자 서서히 수평선 위에 검은 선이 그어지면서 바다와 하늘은 갈라지고, 수면 밑에서 차례로 하니씩 끊임없이 서로를 뒤쫓으며 밀려드는 시커먼 파도로 인해 회색빛 바다에는 줄무늬가 생겨나고 있었다.(버지니아 울프, 《파도》 중에서)
*
이 소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처음 소설을 읽어나갈 때의 그 혼란스러움과 끝없이 이어지는 말들의 향연을, 감당할 수 없는 거센 파도에 덮쳐진 것처럼, 하지만 이내 반복되는 파도의 움직임에 젖어들게 되는, 이 이상한 체험을. 이 소설의 제목이 파도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끝까지 이 소설을 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몇 명인지도 알 수 없는(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인물들의 끝없이 이어지는 ― 실제로는 한 사람의 장대한 독백처럼 보이기도 하는 ― 대화(!)에 정신이 아찔해질 때쯤 책을 덮고 소설의 제목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고 바다의 아득함과 파도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하얀 포말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떠올린다. 그러면 살짝 격앙되었던(?) 마음이 가라앉고 다시 책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언젠가, 읽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겐 모든 소설들이 그런 것 같다고. 그것은 오래전에 읽은 소설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푸념에 다름 아니었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 이 소설이야말로 '읽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소설'임에 틀림없다고. 이 소설의 구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소설의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편이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은 어떨까? 제목처럼, 이 소설은 '언어로 직조한 파도'라고. 파도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물'이 아닌 '언어'로 치환해서 형상화한 것이 바로 이 소설이라고.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파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일이며, 파도의 소리를 듣는 일이라고. 언어의 파도 속에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일이라고.
파도의 생성과 소멸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태양이 아직 떠오르지 않은 하늘과 바다에서 서서히 수평선 위에 검은 선이 그어지면서 바다와 하늘이 갈라지는 순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파도의 탄생이자 생성의 순간이다. 이후 등장인물들의 끊임없는 대화가 시작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넘어가고, 무수히 가지를 뻗고, 거침없이 물결치는 대화들. 그 대화들의 중간중간에 막간극처럼 태양이 떠오른 바다의 풍경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순간의 장면을 삽입해 놓았다.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그나마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그들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태양이 막 바다에 떠올랐을 때 학생이었던 그들은, 태양이 점차 바다를 비추고, 파도의 풍경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때가 되면,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어엿한 어른이 된다. 그리고 태양이 점차 사라지는 밤이 오면, 그리하여 갈라졌던 하늘과 바다가 다시 구분되지 않는 순간이 오면 이렇게 절규하는 것이다.
내 안에서도 파도가 일어선다. 부풀어 오르고 등을 구부린다. 나는 다시 한번 새로운 욕망을, 기수가 처음에 박차를 가하고는 뒤로 잡아끄는 자존심이 강한 말같이 내 밑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것을 느낀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너, 우리가 이 보도를 발길질하며 서 있을 때 어떤 적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끼는가?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이 적이다. (···) 죽음에 맞서서 말을 타고 돌진한다. 말에 박차를 가한다.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311쪽)
바다 위로 태양이 뜨고 지는 하루 동안에 그들은 일생을 통과한다. 이윽고 이어지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
저 문장이 주는 여운이 생각보다 길었다. 어디선가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 작중 화자의 마지막 말이지만, 이것은 분명 울프 자신의 말일 것이다. 울프는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죽음을 본 것일까? 그리하여 죽음에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죽음에 몸을 내던지는 선택을 한 것인가?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일이란 말인가. 죽음에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니! 하지만 죽음에 정복당하지 않겠다는 것,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은 죽음과 맞서겠다는 의지의 표명과도 같다. 파도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파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파도에게 죽음은 다시 태어남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파도는 부서지고 솟아오른다. 솟아오르고 부서진다. 파도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그것이 영원이 아니면 무엇일까. 어쩌면 울프는 기꺼이 죽음을 향해 몸을 던짐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영원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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