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신경쓸 것 없이, 십대 중반부터 꾸준히 읽어온 작품의 작가에게 지금의 내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을 마음껏 물어보면 된다. 무라카미 씨의 우물을 위에서 엿보며 이리저리 상상하는 대신 직접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무라카미 씨와 함께.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8쪽)
*
중요한 것은 아낌없이 시간을 들이는 일, 그리고 '지금이 그때'라는 것을 아는 일이다.(9쪽)
*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서, 생각지 못한 사람이,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죽는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 같아요. 진짜 리얼리티는 리얼리티를 초월한 겁니다. 있는 사실을 리얼하게 쓰기만 해서는 진짜 리얼리티가 되지 않죠. 찔러넣을 데가 한 단계는 더 있는 리얼리티를 만들어야 해요. 그게 픽션입니다.(38쪽)
*
인터뷰든 에세이든, 단편이든 장편이든 제가 글을 쓰는 원리는 전부 같습니다. 보이스를 한층 리얼하게 만들기, 그게 우리 소설가의 중요한 일이죠. 저는 이걸 '매직 터치'라고 불러요. 만지는 것이 전부 황금이 되는 미다스왕 이야기 있죠? 마찬가지예요. 많건 적건 이 '매직 터치'가 없으면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읽어줄 만한 문장을 쓰지 못해요. 물론 작가라면 제각기 다른 '매직 터치'를 가지고 있지만요.(43쪽)
*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면 '아, 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을 써볼까' 하죠.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첫 문장도 그랬어요. 쓴 뒤에는 반년이든 일 년이든 묵혀두면서 가끔 꺼내서 고치고, 조금씩 갈고닦아서, 그게 내 안에 제대로 남는지 아닌지 기다립니다. 찰흙덩어리를 벽에 던져서 달라붙는지 떨어지는지 확인하듯이. 물론 깨끗이 떨어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81쪽)
*
2차대전 이후 일본도 그랬는데, 많은 독일인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들을 피해자 입장에 놓으려고 했어요. 우리도 히틀러에게 속았고, 마음의 그림자를 빼앗겼고, 그 탓에 혹독하게 고생했다는 막연한 피해자 의식만 남죠. 일본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일본인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해서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은 자꾸 뒷전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사실이 이렇다저렇다 하는 문제로 도피하죠. 그런 것도 '나쁜 이야기'가 낳은 일종의, 뭐랄까, 후유증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들도 속은 거라는 말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면이 있죠. 천황도 나쁘지 않다, 국민도 나쁘지 않다, 나쁜 건 군부다, 하는 식으로. 그게 집합적 무의식의 무서운 면입니다.(102쪽)
*
얼마 전 집에 있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여러 연주자 버전으로 비교하며 들어봤어요. 총 열다섯 장 정도를요. 그랬더니 글랜 굴드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들과 압도적으로 다르더군요. 그야말로 독보적인 경지랄까요. 어디가 다른지 한참 생각하다가 겨우 깨달은 게, 보통 피아니스트는 오른손과 왼속의 콤비네이션을 생각하며 연주하잖아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다들 그럴 거예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글렌 굴드는 달라요. 오른손과 왼손이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겁니다. 오른손 왼손이 각자 자기 뜻에 따라 움직여요. 그런데 그 둘이 하나가 되면 누가봐도 훌륭한 음악세계가 확립되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왼손은 왼손이 할 일만, 오른손은 오른손이 할 일만 생각한단 말이죠. 다른 피아니스트는 반드시, 지극히 자연스럽게 오른손과 왼손을 조화시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굴드의 연주들을 비교해봐도 1955년 버전이 그 오른손과 왼손의 분리감이 훨씬 강하고요.(109쪽)
*
독자들은 생각보다 민감하게 알아차려요. 아, 이건 자기 경험을 어떻게든 객관해보려고 쓴 거구나, 라고. 그러면 이야기가 얄팍해지고, 개인적으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알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말을 제가 했던가요? 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사실 최근에는 딱히 스스로를 알고 싶다는 마음도 없어진 것 같아요. 이제 와서 알아봤자 별수없잖아 싶은 거죠, 정말로.(190쪽)
*
한 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으며 찬찬히 곱씹죠.(197쪽)
*
글을 쓴 뒤 어느 시점에서 잠정적으로라도, 자신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찾아오는지요? '자신을 안다'는 건 어디서 어떤 식으로 이뤄질까요?
아주 뚜렷합니다. 아까 말했듯이, 소설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의미를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란 게 있잖아요. 그래도 작가는 그런 부분을 소설적으로 완벽히 써내야 합니다. 이 문장은 넣는 게 좋을까, 빼는 게 좋을까, 여기까지만 쓰고 뒤는 쓰지 않는 게 좋겠다 하는 식으로 계속 선을 그어야 하죠. 그런 몇 가지 결단을 내리는 행위 자체가 자신을 아는 일이다―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문장은 날카롭고 까다로운 도구예요. 칼과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닿기 직전에 멈출 수도 있고, 슬쩍 찌를 수도 있고, 사용법이 여러 가지죠. 종이 한 장만큼의 거리감. 그걸 파악하는 것이 곧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봅니다.(221~222쪽)
*
스스로를 알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하면 아무래도 '자아 찾기' 같은 진부한 표현으로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아니다. 소설가에게는 문장을 갈고닦는 행위 속의 한순간, 그 체험이 곧 자기 자신이다. 소설가가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글을 쓴다거나 하는 행위가 아니라, 문장을 갈고 다듬는 행위 자체다. 요약하면 이런 얘기가 되겠군요.(226쪽)
*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어려워요.(236쪽)
*
조지프 콘래드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작가는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를 쓸 생각이더라도 저도 모르게 환상적인 세계를 써버리곤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콘래드에게 '세계를 환상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신비적으로 그리는 것'과 '세계가 신비롭고 환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라는 겁니다. 자생적인 괴리가 있죠.(270쪽)
*
―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는 항상 관찰자의 입장이죠. 직접 겪어볼 일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없으니까요. 누구나 지금 이 순간에―모순된 말이지만―또 항상 새롭고, 유일하게 우리 곁에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죽은 뒤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셈인데, 그런 쪽으로 상상해볼 때는 없으세요? 죽은 뒤에 생길 일들요.
무라카미 이 선반 가득한 레코드는 다 어떻게 될까(웃음)(327~328쪽)
'기억할만한지나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강원택,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21세기북스, 2019. (0) | 2025.11.12 |
|---|---|
| 배수아, 《동물원 킨트》, 레제, 2025. (0) | 2025.11.05 |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1977년 TV2 Cultura 인터뷰 중에서 (0) | 2025.10.15 |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1984BOOKS, 2021. (0) | 2025.10.10 |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다산책방, 2023. (0) | 2025.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