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동물원 킨트》, 레제, 2025.

시월의숲 2025. 11. 5. 23:45

내가 그것을 찾아냈다고 하는 것은 이때 가장 합당한 단어는 아니야. 그것이 나를 찾아낸 것에 불과해. 동물원이라는 장소는 나에게 평가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거야. 동물원이란, 그 자체로 내가 지도에서 발견한 모든 첫번째 장소, 그것이야.(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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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물원을 가지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 생각하려는 거야. 한 번도 동물원 같은 것은 가져본 적도 없고, 당연하잖아? 또 동물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으니까. 혹은 동물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았다거나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는 말을 풍문으로라도 들은 적이 없어. 동물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이 세상의 어떤 백만장자보다 더 그들이 궁금해.(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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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킨트는 단지 계속해서 길을 걸어. 그들은 날씨가 나쁘고 우울해져서, 비명을 지르는 뭉크의 그림 속에 있다고 느끼게 되는, 그런 날들을 좋아해. 그런 날 동물원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다가, 그들은 갑자기 알게 돼. 그는 동물원 킨트였던 거야. 자기 자신이 동물원 킨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는, 어느 흐린 날, 동물원으로 가는 거리 한가운데서 갑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주변에 더이상 정기적으로 동물원으로 가는 친구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야.(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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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유래는 결국 사냥터야. 넌 그걸 모르는구나. 넌 기껏해야 그런 사냥터지기 꼬마 정도나 될 수 있을 게 분명해."

"난 동물원 킨트야."

하마는 더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어.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 단어는 들어본 적이 없어. 도대체 그게 뭐지?"

"동물원을 갖고 싶어하거나, 그곳에 계속해서 있고 싶어하거나, 그곳을 찾아간다거나, 그곳에 속하고 싶어하는 거야. 혹은 그것이 되고 싶어하는 거야. 서서히 말이야."(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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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두 사촌은 언뜻 보아서는 둘 다 스무 살을 넘지 않은 것 같았어. 둘 다 얼굴빛이 창백하고 입술이 얇은, 아주 섬세해 보이는 인상이었어. 그들이 마치 잔인하고 슬픈 전쟁영화를 보고 막 극장에서 나온 소년들처럼 입술을 떨고 있는 것이 사진에서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지.(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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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지 내가 하나의 풍경이며, 그것을 완성시키는 일종의 정물이며, 단지 그것을 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행복했어. 혹독한 바람, 낮은 밀도의 대기, 아직 채 끝나지 않은 살풍경한 겨울에 찾아온 단 한 명의 여행자, 그리고 내가 발견한 양 동물원, 감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 나는 이곳의 모든 길과 직선이 향하고 있는 하나의 지점, 그것을 보려고 했지만 하늘에 높게 떠 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과잉된 섬광 그 자체인 태양빛을 느낄 뿐이었어. 나는 그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었어. 그 장소는 나를 떨게 만들었거든. 나는 가방을 옆에 두고 길 한가운데에서 팔을 위로 뻗은 채 길게 누웠어. 내 몸 역시 빛과 바람과 길이 향하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하게 되었어. 나는 마침내 풍경의 일부가 되었어.(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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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모든 바람의 고향이어서, 그 모든 바람이 이곳을 향해서 불어온다고 생각될 정도였어.(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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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잘 지내고 있겠지?

나는 너와 절교하기를 원해. 이제 다시는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거야.(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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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살러 갈 때는 과거 머물렀던 장소에 속했던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어. 나는 결국 장소에 속하는 인간이었으니 말이지. 가능하면 나는 말이지, 사람보다 더욱 완벽하게 장소에 속하는 사물이고 싶어. 알디 슈퍼마켓의 비닐백이라든가, 날짜와 시간까지 찍혀나오는 전차 승차권이라든가, 밑바닥에 두 가지 언어를 혼합해서 문장을 만들어놓은 맥도날드의 커피잔이라든가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이런 식으로 절교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나는 단지 장소를 옮겨 머무는 조용한 사물에 불과하니 말이야.(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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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것들과 절교하려고 해. 

너도 그 모든 것들 중의 하나니까.(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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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멸된다는 것은, 참 기분 좋고 편안한 느낌이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동물원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에도 나는 비슷한 것을 느끼곤 해. 나는, 점점 없어지는 거야. 그 후에 나를 지배하는 것은 그토록 먼 거리감. 절대치로 가벼워지는 존재의 소멸. 슬픔 없는 눈물이나 같은 옷을 입은 구별되지 않는 백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그런 것에 불과해. 나는 동물원으로 걸어들어가. 이윽고 나는 사라져.(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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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동물원 킨트였지. 그래, 이제야 생각났어. 어때, 동물원 킨트? 네가 원하는 동물원을 찾아냈어? 아니면 그것을 마침내 가지게 되었어?

아니,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

그건 무슨 뜻이야?

내가 동물원의 일부가 되었어. 그래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여전히 엉뚱한 소리만 하는구나.(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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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아무런 인사를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고 해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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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을 멀리 위로 하고 바닥에 길게 누워봐. 그러면 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존재의 배경이 만들어내는 소실점을 향하게 될거야. 나는 그것을 '동물원 놀이'라고 부르지. 너도 그것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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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서의 현실과 그 기준이란, 유행이나 다수결 혹은 파티에 초대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금박 글자의 명함처럼, 글을 쓰고 있을 때의 나에게는 가장 무시하고 경멸해야 할 대상이 된다.(178쪽,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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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이란 정말 멋진 것이다. 그것은 거의 쾌락의 차원이다. 그것을 찬미한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진정 고립을 모르거나 혹은 나약하게 겁을 먹은 것이다. 그러나 종종,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고립에 대한 찬미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고발이라거나 소통에 대한 그리움인 것으로, 정반대로 왜곡되곤 한다. (글이 서투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글을 쓸 때 내가 선호하는 몇 가지 사소한 방법이 있는데, 동일시하거나 비판하거나 개입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가능한 한 이런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고립이란 그것과 비슷하다. 고립이란 반드시 혼자 지낸다거나 배타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고립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은 그런 식으로 고립된 정신의 한 종류에 대한 것이다.(182쪽,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