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최소한의 말들을 징검돌 삼아 뛴다. 그렇게 연결된다. 최소한의 말들 사이에, 선언이나 예견을 닮은 말들이 제자리를 갖는다. 극단적이거나 극단에 닿은 말이 아니라, 극단의 자리를 마련해 거기 공간이 있음을 알리는 말들.(···) 미화되지도, 그렇다고 현실 고발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는 듯한 몰랐던 생의 이야기가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몰랐던 순간을 만들어 낸다. 거기서 작은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어린아이의, 여자들의, 이민자들의, 동물들의, 꾸밈을 거부하는 목소리들이.(9쪽, '이 책에 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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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말한다, 사람은 자기 나라의 냄새는 어디서라도 기억할 수 있지만, 오직 멀리 있을 때만 그 냄새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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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의 도살 행위는 금지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소음을 숨기기 위해 라디오를 켜고 창문을 연다. 닭이 죽기 전에 미리 보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살려 두고 싶어질 테니까. 수프에 들어가지 않는 건 죄다 변기로 간다. 나는 변기가 무서워서 밤에는 세면대에서 오줌을 눈다. 거기에서라면 죽은 닭이 다시 튀어나오는 일은 없다.(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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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어디라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는 데 익숙하다. 그러러면, 내 푸른 수건을 의자에 펼쳐 놓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바다다.
내 침대 곁에는 항상 바다가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나는 바로 헤엄칠 수 있다.
내 바다에서 헤엄치기 위해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밤이면 나는 바다를 어머니의 꽃무늬 가운으로 덮는다.
소변을 보러 일어날 때 상어가 날 잡아먹지 못하도록.(2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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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가 얼마나 아플지 상상해 보라고, 그러면 어머니가 언제라도 천장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언니는 말한다. 하지만 소용없다. 나는 항상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갑작스런 소식에 놀라지 않을 테니까. 나는 눈 앞에서 본다, 들고 있던 횃불이 머리카락에 옮겨붙고, 불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추락하는 어머니를. 내가 허리를 굽혀 바라보면, 어머니의 얼굴은 재가 되어 바스러진다.(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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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늙게 만든다.
나는 외국의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다.
루마니아의 아이들은 늙은 채 태어난다. 이미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가난하고, 부모의 근심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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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태생 외국인이 신발을 잃어버렸다. 그는 신발을 집에 둔 채 집을 강에 던져 버렸다.
아니면 집이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인가?
태생 외국인은 강에서 강으로 찾아다녔다.
그는 물속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의 목에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여기 천국
외국인이 물었다: 아니, 천국이라고?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그러자 집이 다시 나타났지만 완전히 다른 장소였다.
아마도 그건 다른 집일 것이다. 집은 외국인의 신발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집은 문을 잃었다.
그건 연미복이 만들어 낸 이야기냐고 내가 묻는다.
아니, 이건 우리의 이야기야, 아버지가 대답한다.(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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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에게는 저마다 죽음의 이유가 있다.(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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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것들
다른 사람들을 조심하기.
우리를 놀리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기.
그들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는 항상 우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 내기 때문에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도 아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았다.(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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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말해 주지 않으려 하지만, 나는 아이가 폴렌타 속에서 끓는 이유를 이미 안다.
아이는 무서워서 옥수수 자루에 숨어 있었다. 그 상태로 잠이 든다. 할머니가 와서 자루의 옥수수를 뜨거운 물속에 넣는다. 아이에게 줄 폴렌타를 만들려고. 그런 후 아이가 깨어났을 때 아이는 이미 푹 익어 버렸다.(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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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옥에 빨리 익숙해지면 아마 우리는 곧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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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거리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집들과 거리가 항상 철거되고 새로 세워진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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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문학을 의심하는 이유는 위대한 작품이나 작가의 존재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위대함이라는 성질이 문학과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내가 말한다.(205쪽, '옮긴이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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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장은 책뿐 아니라 책에 관한 화제를 좋아하는데, 그건 사람들이 빨간색이나 베네치아나 흰 소시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의 그런 취향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설명하는 유일한 성분을 대하는, 바로 그런 식이다.(206~207쪽, '옮긴이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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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월세를 지불하는 이유는 거기 책들이 살기 때문이다. 일과 틈틈이 책을 읽고 책장을 정돈하고 책을 골라내고 재배치하고 그러는 중에 서서 몇 쪽을 잃고 문득 생각난 듯 내게 이런저런 책들을 추천한다. 예를 들어 내가 허영에 대해 말을 꺼내면 그는 책장 이곳저곳에서 허영과 연관된 책들을 여럿 가지고 온다.(209쪽, '옮긴이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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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은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원형이야. 하지만 나는 내 글이 유년기 키치가 되어 버릴 것이 두렵고 혐오스러워. 회고하고 고백하는 것. 변명하고 반추하는 것. 되새기고 전달하는 것. 우리가 아방가르드로 탈출하는 건 아무것도 고백하거나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몰라. 자기 자신의 스파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214쪽, '옮긴이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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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피부는 언어 자체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들을 좋아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스스로 탈출하는 자들.(215쪽 '옮긴이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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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말은 어차피 너무 많이 말해졌다.
부족함과 생략의 언어를 통해 증폭되는 효과.
책 나무 대신 비 나무.
말해지지 않아야 하는 말, 그럼에도 텍스트 안에 머물러야만 하는 말.(216쪽, '옮긴이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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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운명이라는 가장 강렬한 경험에 사로잡힌 작가는 그 운명과 작별하기 위해 더욱 깊이 그 운명을 응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유머를 잃지 않기, 이것이 중요하다.(218쪽, '옮긴이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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