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수도원으로 들어선 골드문트는 벌써 친구가 될 만한 존재를 둘이나 만난 기분이었다. 그건 바로 밤나무와 수위였다.(18쪽)
*
검은 머리에 마른 체격인 나르치스에 비해 골드문트는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밝고 찬란했다. 나르치스는 철학자에 분석가였지만, 골드문트는 몽상가에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대립성은 그들의 공통점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둘은 모두 고결했다. 두 사람 모두 재능과 개성이라는 면에서 다른 이들보다 확연히 뛰어났다. 두 사람은 어떤 특별한 경고를 받고 세상에 태어난 운명이었다.(26~27쪽)
*
사랑으로 충만한 인간, 섬세하고 풍부한 감각의 소유자, 꽃향기와 아침의 태양, 한 마리의 말, 날아가는 새, 그리고 음악을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가 하필이면 정신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금욕자가 되려고 저토록 집요하게 열망한단 말인가?(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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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의 영혼을 방랑하듯이 더듬고 다닌 후 나르치스는 점차 깨달았다. 벗이 인생의 일부분을 상실한 사람이라는 것, 어떤 궁지에 몰려서 혹은 무언가에 홀려서, 과거의 한 조각을 잃어버리기로 스스로 작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는 것을.(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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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향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도 그랬다. 어머니는 가정과 저택, 남편과 아들, 공동체와 질서, 의무, 명예를 버렸고, 불확실한 세계로 떠나버렸다. 오래전에 그 세계 속에 깊이 가라앉았으리라. 그가 지금 목표를 갖지 않고 있듯이 어머니도 목표가 없었다. 목표를 갖는 것은 다른 이들의 운명이지 그의 운명은 아니었다. 오, 나르치스는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것을 모두 내다보고 있었던가, 그의 통찰은 얼마나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는가!(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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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이며 살아 있는 건 오직 골드문트 내면에서 숨 쉬는 생명뿐이었다. 불안하게 고동치는 가슴, 그리움의 통증, 꿈의 희열과 두려움, 그것이 그가 속한 세계였다. 그는 온 마음으로 자신의 세계에 몰두했다. 책을 읽거나 공부하다가도, 다른 급우들과 있을 때도 그는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가라앉은 채 주변을 완전히 잊고 오직 내면의 흐름과 목소리에만 스스로를 내맡길 수 있었다. 그는 아득히 먼 곳으로 휩쓸려갔다. 어둠의 멜로디가 울리는 깊은 우물 속으로, 동화의 체험이 가득한 오색의 심연으로.(99~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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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뒤, 골드문트 자신은 어떻게 될까? 아, 모든 것이 불가해하구나,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슬픈 것이로구나.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사람은 땅에서 살고 돌아다니며, 말을 타고 숲을 지나간다. 그러면 많은 사물들이 요구하는 눈길로, 약속의 눈길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눈길로 사람을 응시한다. 저녁 하늘의 별, 한 송이의 초롱꽃, 갈대가 무성한 초록빛 호수, 어떤 사람이나 소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그러면 때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나 항상 그리워하던 일이 당장 일어날 것 같고, 모든 사물을 뒤덮은 베일이 벗겨지리라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지나가 버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신비한 마법은 벗겨지지 않은 채로 사람은 늙는다. 종국에는 안젤름 신부처럼 노회하게, 다니엘 수도원장처럼 지혜로워 보이더라도. 어쩌면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여전히 기다리고 여전히 귀를 기울이는 것뿐이리라.(103~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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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아름다운 시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베르길리우스의 시라고 해도 이 식물의 줄기에 난 작디작은 꽃 이파리의 나선형 법칙만큼 명료하고 지혜롭고 아름답고 의미심장하지는 못했다. 인간이 이런 꽃 한 송이만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뿜이고 행운일까, 얼마나 황홀하고 고귀하며 의미 깊은 행동일까! 하지만 누구도 해낼 수 없다. 어떤 영웅도 어떤 황제도 어떤 교황도, 심지어 성자조차도 해낼 수 없다.(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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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마음을 장악한 불안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고요하고 차분한 겨울 세상을 그는 충격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고요한가, 얼마나 고요하게 만드는가. 숲과 농경지, 언덕과 황무지는 태양과 바람, 비와 가뭄, 그리고 눈, 무엇에게든 경건한 태도로 자신을 내맡기며, 단풍나무와 물푸레나무는 힘겨운 겨울이라는 재난을 아름답고도 부드럽게 참고 견뎌내지 않는가! 정녕 인간은 이들처럼 될 수 없는가, 이들에게서 배우지 못한단 말인가?(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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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뻔뻔하고 영리한 이 남자가 옳을지도 모른다. 골드문트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그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랑자가 될 수는 없으리라. 언젠가는 반드시 어딘가의 집 담벼락 아래로 기어들어가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집 없고 고향 없는 자, 목적 없는 자로 남으리라. 어디에 가더라도 진정으로 보호받는다는 느낌, 집에 있는 듯한 안정감은 얻지 못하리라. 세계는 항상 변함없이 신비한 매력으로 빛날 것이고 신비한 스산함으로 그를 둘러쌀 것이며, 항상 변함없이 그는 이런 정적을 향해 귀를 기울일 것이고, 그 정적의 한가운데서 그의 심장은 불안하고도 헛되이 고동칠 것이다.(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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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모든 예술과 모든 정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일 거라고 골드문트는 생각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덧없이 사라질 것이 무서워 떤다.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슬프게 지켜보면서 우리도 그처럼 허무하게 시들어버릴 것을 느낀다. 우리가 예술가가 되어 형상을 만들거나 철학자로서 세상의 원리를 찾고 생각을 말로 정리한다는 것은 거대한 죽음의 춤판에서 뭔가를 구해내기 위함이고,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을 어떤 것을 설정하려는 행위다. 명장이 아름다운 마돈나의 모델로 삼았을 여인은 이미 시들었거나 아니면 죽었을 것이다. 명장도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그의 집에는 다름 사람들이 살게 되고, 그의 식탁에서 다른 사람들이 밥을 먹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백 년, 아니 그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고요한 수도원 교회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리라. 변함없이 아름답게, 변함없이 활짝 피어나고 변함없이 슬픔에 잠긴 똑같은 그 입으로 변함없이 미소를 지으며.(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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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문트에게 사랑과 쾌락은 삶에 온기를 주고 가치를 부여해 주는 진실로 유일한 것이었다. 명예욕을 모르는 그에게는 주교의 삶이나 거지의 삶이나 하등 차이가 없었다. 수입이나 재산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재물을 경멸했고 부를 위해서 어떤 희생도 원하지 않았다. 간혹 돈을 풍족하게 벌었을 경우에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즉시 탕진해버렸다. 여자들의 사랑, 성애의 유희,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했다. 그가 자주 울적함과 권태에 빠지는 원인도 따지고 보면 쾌락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알아버린 탓이었다. 사랑의 쾌감은 순식간에 화르르 타올라 찰나의 황홀경에 몸부림치게 만든 다음 빠르게 연소해버리고 흔적 없이 꺼지고 말았다. 그는 이 과정 속에 삶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인생의 모든 환희와 고통이 압축된 상징이었다. 그는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듯이 슬픔과 허무함으로 인한 전율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 비애 역시 사랑이었고, 역시 쾌락이었다. 절정의 순간이면 황홀하고도 확실하게 사랑의 쾌감이 몰려오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 확 사그라들면서 허무하게 죽어버리는듯이, 마찬가지로 내밀한 고독과 음울에 깊이 빠져 있어도 바로 다음 순간에는 얼마든지 삶의 밝은 면으로 돌진하려는 욕망에 자신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쾌락은 하나였다.(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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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아버지 세계와 어머니 세계의 결합이며 정신과 피의 결합이었다. 예술은 가장 감각적인 차원에서 출발하여 가장 추상적인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혹은 가장 순수한 이데아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가장 피투성이 육신으로 종결되었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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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필요 없이 오직 날씨와 계절에만 의존하면서 어떤 목적지도 없이, 비를 막아줄 지붕도 없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우연에 자신을 맡기며 순수하고도 용감하게, 곤궁하면서도 강하게 살아간다. 그는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의 후예이고 순결한 동물의 형제다. 그는 매순간 하늘의 손이 직접 내려주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산다. 태양, 비, 안개, 눈, 더위와 추위, 편안과 곤란. 그에게는 시간도 없고 역사도 없고 노력도 없다. 집을 가진 자들이 필사적으로 신봉하는 발전과 진보라는 괴상한 우상도 없다. 방랑자 중에는 섬세한 사람도 있고 거친 사람도 있으며, 솜씨가 좋은 사람과 아둔한 사람, 용감하거나 겁쟁이가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마음에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모든 방랑자는 인간의 역사 이전의, 이 세계 첫 번째 날을 살아간다. 방랑자를 좌우하는 것은 언제나 몇 안 되는 단순한 욕구와 필요뿐이다. 방랑자는 영리할 수도 어리석을 수도 있다. 방랑자는 생명의 허무하고 덧없음을 잘 안다. 생명을 가진 만물이 냉랭하고 드넓은 우주에서 오직 한 줌의 따뜻한 피를 지닌 채 겁에 질린 가엾은 모습으로 떠도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방랑자는 단지 저열하게 게걸스럽게 굶주린 위장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인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인간이든 방랑자는 소유자와 정주민에게는 중오와 경멸, 공포의 대상이며 적이고 원수다. 소유자와 정주민은 존재의 허무를, 시시각각 속절없이 꺼져가고 있는 생명을, 우리를 둘러싼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운 무자비하고 차가운 죽음을 떠얼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272~273쪽)
*
모든 삶은 일단 분열과 모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풍성한 꽃을 활짝 피운다. 도취를 알지 못하는 합리와 이성이 무슨 소용이며 죽음이 그 뒤에 도사리고 있지 않다면 정욕이 무엇이겠는가. 성별의 영원한 적대관계가 없다면 사랑은 얼마나 공허하겠는가.(273쪽)
*
삶은 아름다웠다. 행복은 아름답고 덧없었으며, 젊음은 아름답고 빠르게 시들어갔다.(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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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날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혔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슬펐는지, 그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 슬픔은 지나가고 고통과 절망도 기쁨과 마찬가지로 지나갔다. 감정은 지나가고 흐릿하게 사라졌다. 깊이와 가치를 잃어가다가, 마침내 어느 날 한때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왔다. 심지어 고통조차도 늙고 시들어버리는구나.(329쪽)
*
철학자나 고행자를 흉내 내지 말고 너 자신이 되라고. 너 자신을 실현할 길을 찾으라고!(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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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부터 항상 당신이 부러웠는데, 그건 당신의 지식 때문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 그리고 균형과 평화 때문이었어요."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 골드문트. 자네가 생각하는 평화는 존재하지 않아. 물론 평화가 있긴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떠나지 않고 상주하는 평화는 없단 말이야. 끈임없이 치열한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평화, 매일매일 싸워서 얻어야 하는 평화가 있을 뿐이야. 그런데 자네는 내가 투쟁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 공부하며 투쟁하는 것도, 기도하며 투쟁하는 것도 보지 못한 거야. 그편이 나아. 자네가 아는 건 단지 내가 자네보다는 기분에 덜 좌우된다는 거야. 그걸 평화라고 생각한 거지. 그건 평화가 아니라 투쟁이라네. 진정한 삶이라면 예외 없이 겪는 투쟁이고 희생이야. 자네도 마찬가지고."(411~412쪽)
*
놀랍도록 평안하며 초연한 표정, 체념을 받아들인 선량한 노인이 갖는, 아무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 그동안 인간의 얼굴을 읽어온 경험에 의해 나르치스는 너무도 많이 달라지고 낯설게 변한 골드문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영혼은 현실을 아주 멀리 떠나 꿈의 길을 걷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저 세상으로 통하는 문 앞에 도달해 있는지도 몰랐다.(429쪽)
*
늦었지만 오늘이라도 꼭 말하고 싶어. 널 사랑해 골드문트. 넌 나에게 정말로 소중한 존재였고,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는지 몰라. 자네에게 이런 말은 큰 의미가 아닐 수도 있겠지. 자네는 사랑에 익숙하니까. 사랑이란 자네에게 희귀한 사건은 아닐 테니까. 자네는 수많은 여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그걸 마음껏 누렸겠지.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의미가 좀 달라. 내 삶에는 사랑이 거의 없었네. 내 생에는 가장 소중한 것이 빠져 있었던 거야. 한 번은 다니엘 원장님이 나에게 오만하가도 한 적이 있네. 그분이 제대로 보신 거야. 물론 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아. 공정하고 올바르게 대하려고 늘 노력하지. 그러나 한 번도 사람을 사랑한 적은 없어. 수도원에 두 명의 학자가 있으면 나는 학식이 높은 쪽을 더 좋아했지. 약점이 있는 학자를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말이야. 그런 내가 사랑에 대해 배웠다면 순전히 자네 때문이야. 자네만은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자네만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자네는 상상하지 못해. 이건 사막의 우물, 황무지의 꽃나무와 같아. 오직 자네 덕분에 내 가슴은 삭막하지 않고, 신의 자비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게 된 거야.(433~434쪽)
*
"그런데 나르치스, 당신은 어머니도 없이 어떻게 죽으려고 하나요? 어머니 없이는 사랑도 할 수 없죠. 어머니 없이는 죽지도 못하는 거잖아요."(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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