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시월의숲 2025. 2. 2. 16:39

 

 

설 연휴 전, 주말을 낀 삼 일간의 연휴 동안 나는 혼자, 집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이 책을 읽었다. 삼 일간의 공식적인 설연휴가 시작되기 전 내게 주어진 달콤한 휴일이었고(설이 끝난 뒤 더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 기간 동안 나는 내가 책 한 권을 다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어떤 이는 하루에 한 권 혹은 몇 시간 만에 한 권은 우습게 읽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삼일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는 것은, 내 독서 경험에 비추어 하나의 커다란 사건(혹은 성취)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황정은의 소설이었다. 오래전에 읽은 단편집들과 《百의 그림자》, 《계속해보겠습니다》 같은 장편 소설을 읽고 느꼈던 황정은 스타일에서 풍기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듯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정은의 소설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니, 도대체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딱 꼬집어 대답하기 곤란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러니까 이런 것, 인상적인 단문의 사용과 그 짧은 문장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긴 여운 같은 것, 상처를 드러내는 특유의 방식, 드러내고 감추는 서술 방식의 독특함이랄까 뭐 그런 것들. 그것들은 단편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장편이라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장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연작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가족으로 엮인 등장인물들이 각각의 장에서 3인칭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두 자매와 자매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여동생 이렇게 네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그게 궁금한 적이 있었고 실은 지금도 궁금하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로 읽히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 황정은, 《연년세세》,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을 다 읽고 작가의 말에 나오는 저 문장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 소설은 가족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은가. 당연히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읽은 나는 작가의 저 문장 앞에 망설여졌다. 이것은 가족 이야기가 아닌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어떤 이야기인가. 가족이 아닌 각자의 이야기,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픈 각자의 이야기인가? 그런데 각자의 이야기라고 해서 가족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소설 속 인물들은 그들이 누군가의 딸, 어머니, 동생, 언니이기 때문에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 혹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뭐 그런 생각들을.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이야기가 내게 필요한가,라는 물음을.

 

나는 평소 소설을 필요에 의해서 읽지는 않지만, 작가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고 썼다. 나는 저 문장을 읽고 내가 왜 하필이면 설 연휴 전에 이 소설을 읽었는지 생각했다. 그것은 물론 지극히 우연한 선택이었지만 세상에 우연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이 시기에 읽은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필요가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가족에 대한 소설을 가족이 모이는 대명절인 설날 연휴에 읽게 되다니, 하고. 그러니까 나는 설연휴 전에, 내 가족들을 만나기 전에, 이런 고백들을 읽은 것이다.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138쪽)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182쪽)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나는 몇 번이고 이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그 모든 것들을 사랑이라는 말로 퉁치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수긍하게 되는 이상한 힘이 이 소설에는 있었다. 그리하여 끝내 이 말을 하게 만드는 것도. 

 

연년세세 평안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