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여자, 정혜

시월의숲 2005. 5. 29. 17:3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문득 그녀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베란다 한 가득 식물들을 키우고, 점심은 늘 가던 식당만 가고, 우체국에서 일을 하며, 속눈썹이 자주 떨어져 얼굴에 붙고, 말이 별로 없는 여자, 정혜의 일상이. 그녀를 비추는 카메라는 잔잔히 흔들리다가도 때론 격렬해지면서 그녀의 내면에 출렁이는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겉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런 일상의 여린 속살을 찢고  파편처럼 불쑥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금은 없는 엄마에 관한, 신혼여행 첫날밤에 짐을 싸들고 올 수 밖에 없었던, 자신에 관한 아픈 기억. 그런 기억을 가진 여자, 정혜. 그녀의 일상.

 

 

2.

신혼여행 첫날밤 남자는 정혜에게 묻는다.

"처음 남자랑 했을 때 어땠어?"

"......"

그녀는 그런 이야기 안하면 안되겠냐고 애원하듯 말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뭐 어때?"라고 말한다. 그날 밤, 그녀는 짐을 싸서 호텔을 나온다. 그녀의 첫 결혼은 그렇게 끝난다. 무엇이 그녀를 신혼여행 첫날밤 돌아오게 한 것인지, 남자는 전혀 알지 못한다. 남자는 그날 꼭 그런 말을 해야만 했을까? 상대방에게 어떤 아픔이 있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한채. 그녀는 그런 그를 탓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결혼 통보를 알리는 그를 만났을 때도 그녀는 조금 놀랄 뿐,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3.

어느 날, 그녀는 어미 없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혼자 사는 자신의 아파트에 데려온다. 고양이가 가진 외로움과 고독이 그녀 안의 그것과 많이 닮아서 일까. 처음에는 마음을 열지 않고 소파 구석에서 나오지 않던 고양이가 어느 순간 그녀의 발을 핥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대로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

 

 

4.

고양이를 다시 숲속에 내려주며 돌아선 그녀의 가방엔 날이 선 칼이 들어있다. 그 칼을 숨긴 그녀의 발걸음은 자신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에게로 향한다.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켰던, 신혼 첫날밤에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칼을 온전히 꺼내 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의붓아버지에게서 벗어나다가 넘어지고, 급기야는 떨어뜨린 칼을 줍다가 자신의 손만 베고 만다. 남을 향해 들이댄 칼이 결국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만 것이다. 차가운 수돗물에 흐르는 피를 씻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 정혜.

 

 

5.

다시 고양이를 찾으러 간 그 곳에 고양이가 아닌 한 남자가 서 있다. 숫기없고 어리숙한 그. 우체국에 우편물을 맡기러 와 그녀의 얼굴에 눈썹이 붙었음을 말해주는 남자, 일반과 등기우편의 값의 차이를 느릿느릿 물어보는 남자, 편의점 음료코너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고르다 직원에게 핀잔을 듣는 그. 그 사람이 서 있다. 고양이를 자신의 집에 대려와 키웠듯, 그녀는 그를 자신 안에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6.

평범한 듯한 그녀의 일상, 그 이면에 말 못할 아픔이 숨어 있었듯, 우리네 일상의 저 깊은 곳에도 그러한 아픔과 상처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 상처는 결국 자신이 껴앉을 수 밖에 없는 것. 그런 치유의 과정을 여자, 정혜의 일상을 통해 들여다 보면서 일상이 모여서 된 삶을 생각했다. 그 아픔과 상처는 지나가는 삶의 한 부분일지 모르나 그것이 현재의 일상 속에 불쑥 드러날 때 우리는 견딜 수 없어하고, 아파하게 된다. 그러한 일상을 견뎌냈을 때, 우리는 진정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7.

마지막에 남자가 "정혜씨"라고 부를 때 그녀의 표정이 떠오른다.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보이지 않는 정혜의 심리가 스크린을 넘어 내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감정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일상을 견뎌낸 그녀는 아마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

아, 이건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정혜를 성폭행한 사람이 의붓아버지가 아니라 외삼촌이라고 한다. 나는 왜 그를 의붓아버지라고 생각했을까? 뭐, 그거나 그거나 별 상관이 없겠지만...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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