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역, 대합실, 크리스마스

시월의숲 2005. 12. 27. 17:43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그날,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

영화를 보기로 했었는데, 친구는 볼일이 있어 시간이 걸릴 것 같다며 어디 좀 들어가 있으라 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어디에 들어가 있을까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안동역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지만 날씨도 춥고 돈도 별로 없고 해서 그냥 몸이나 녹이고 있자는 생각에 역으로 향했다.

 

대합실 안은 따뜻했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띄엄띄엄 의자에 앉아 있었고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의미없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가끔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바짝 붙어 앉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소근거리기도 하고  킥킥거리기도 했다. 나는 자판기로 다가가 커피를 한잔 뽑아 들고 빈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디론가 가야하는 듯한 기분, 혹은 다들 어디론가 가려고 모인 장소에서 나만 정지된 기분, 갈 곳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려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종이컵의 밑바닥에 서서히 굳어가는 커피를 바라 보며 나는 한없이 침잠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 발차를 알리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나는 일어서서 역을 빠져나왔다. 친구에게는 아직 연락이 오지도 않았는데...

 

역을 빠져나오다 뒤를 돌아보았다. 대합실에 앉아 있던 남루한 행색의 주름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에게 크리스마스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성탄절.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예수님께서는 가난도 구원해 주실 수 있을까? 가난이 죄가 되는 시대에... 아니다. 갑자기 이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 내가...

 

성탄절이 되고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니까 내 마음이 좀 심란해졌나보다. 친구는 30분이나 뒤에 전화를 했다. 만나서 술을 마셨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술을 마셔도 별로 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는 지나갔다. 싱숭생숭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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