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박노자, 《하얀가면의 제국》중에서

시월의숲 2007. 4. 13. 11:57

 

  그러나 우리가 왜 꼭 유럽의 근대적 국민국가를 '절대자의 뜻' '이성의 구현'으로 본 보수주의적 철학가 헤겔(1770~1831)처럼 '오늘의 현실'만 '이상'과 '역사의 목적'으로 여겨야 하는가? 지중해 지역의 고대 노예제나 유럽의 중세 농노제가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 상당수의 다른 지역들이 거치지 않는 한계 많은 사회 · 경제 형태였듯이, 현재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도 산업사회가 취할 수 있는 수많은 형태 중 하나일 뿐 지속 가능하거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현재의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의 속도로 봐서는 근본적인 체질 변화 없이 반세기도 못 갈 지도 모를 이 체제에 편입하는 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감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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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정신의 동양"과 대조를 이루는 "자유정신의 서양"이라는 담론의 구조는 비서구 지역 지식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 · 체화한 서구 지배층의 자만에 찬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자유'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본 존재론적 의미의 자유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선택권'을 뜻한다 그러나 대다수 서구인들은 그들의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제도권 교육을 받고 취직하고 생산  · 소비의 순환에 빨려드는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들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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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중심의 세계는 우리가 지나가게 된 하나의 단계일 뿐 인류 역사의 종점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이상적인 서양'이라는 그림을 말끔히 지워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 평등의 길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 박노자, 《하얀가면의 제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