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고상하고 지적인 살인마 - 한니발

시월의숲 2007. 5. 12. 16:54

안소니 홉킨스와 줄리앤 무어가 주연한 영화 <한니발>을 보았다. 예상대로 이전에 보았던 <한니발 라이징>보다는 훨씬 내 취향이었고 재미가 있었다. 세상에, 한니발의 출생과 식인 살인마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한니발 라이징>이 그렇게도 밋밋할 줄이야. 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안소니 홉킨스의 한니발 렉터가 가진 여유롭고도 고상하며 치를 떨 정도로 잔인한 살인마의 아우라를 그리 쉽게 표현할 수가 있었으랴마는.

 

솔직히 말해서 <양들의 침묵>보다는 스릴감이 좀 떨어졌지만 그와는 달리 한니발이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한니발>은 좀 더 우아한 분위기였다. 처음 우려했던, 스탈링 역의 줄리앤 무어도 오히려 조디 포스터가 나오는 것 보다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조디 포스터가 스탈링 역에 못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 <양들의 침묵>에서는 조디 포스터가  <한니발>에서는 줄리앤 무어가 딱 맞았다는 말이다. 강인하고 냉철한 면으로는 조디 포스터가 더 낫지만, 상처받고 부서질 듯한 내면을 드러내기에는 줄리앤 무어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뭐, 둘 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연기파 배우들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 둘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를 보는 것도 좋았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우아한 한 편의 오페라 같았다. 살인마를 이렇게 아름답게(!) 다룬 영화가 있었던가, 생각될 정도로. 그가 싸이코 기질이 다분한 살인마이긴 하지만 그는 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인물들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가 살인하는 이유란, 어떤 예술 작품에 흠집이 난다는 이유로, 예를 들어, 악단의 연주자 중에 실력이 없어 그 음악의 예술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사람을 없애는 그런 류의 것이다. 이 영화를 살짝 달리 생각해보면, 예술을 숭배하는 고귀한 정신을 가진 자의 기행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러한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처분이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한니발은스탈링을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스탈링이 가진 정의를 사랑한 것일까. 한니발에게 있어서 스탈링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도덕심과 정의 같은 것의 표상이었을까? 뭐, 그거나 그거나 같은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마지막에 한니발이 스탈링에게 행한 행동으로 봤을 때,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니발에게 사랑이란 단어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 또한 한니발의 고상한 취향에 속한 인물이었거나, 그녀가 자신을 쫓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쩌면 한니발은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한니발이 가진 캐릭터가 한없이 얄팍해지고 만다. 너무도 단순한 생각. 아무 것도 밝히지 않고 그저 신비로움 속에 쌓여 있을 때 한니발은 빛을 발한다. 사악한 아름다움. 어딘가 뒤틀렸지만 타인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시선. 결국 스탈링은 한니발로 인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았나. 스탈링이 한니발에 의해 치료 되었듯, 한니발도 스탈링으로 인해 어딘가 약간의 치유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너무 로맨틱한 환상일까? 이 피 튀기는 살육의 영화를 보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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