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밀양 (Secret Sunshine)

시월의숲 2007. 5. 31. 12:44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보았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개봉하고 나니 볼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그동안 본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마냥 편하게만 볼 수 없는, 다시 말해 영화를 보면서 즐길 수 있는 달콤한 환상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꼭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또 '비밀의 빛'이 무엇인지도 궁금했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영화관으로 직행, 보고 난 후엔 묵직하고 따스한 무언가가 내 가슴 속에 들어 있었다.

 

보는 내내 불안하고, 때론 슬펐으며, 분노했고, 우습다가도 사랑스러운 느낌이 교차했다. 한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많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구나 생각했다. 물론 다른 영화들을 보면서도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같은 감정이라도 이 영화에서 만큼은 더욱 깊이 와 닿았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처절하고도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린 감독의 역량과 그러한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는 신애 역의 전도연에게서 비롯된 것일 게다. 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는지 이제 확실히 알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구원에 관한 영화라고들 한다. 그건 맞는 말인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의 피상적인 믿음의 문제와는 달리 신애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한 인간의 보다 진실된 구원의 문제 말이다. 구원에 관해서 보다 본질적으로 다가갔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신애를 통해서 감독은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혹은 인간은 과연 자신이 저지른 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가장 하기 힘든 용서는 원수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가 아닐까 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신애가 정작 자신의 아이를 유괴한 범인을 보고서도 분노하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 고개를 숙인것은, 진정한 범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큰 죄의식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며 그러한 죄의식에서 도피하기 위해 선택한 종교조차 그녀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얄팍한 위장에 자나지 않았다. 그러한 위장을 벗겨주는 사건이 바로 유괴범을 면회간 교도소에서의 대화이다. 그건 정말 충격이었다. 신애게에 있어서 그것은 신의 배신이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이 회피하고자 했던 치졸한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었던 것이다. 발가벗겨진 자기 자신을 보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유괴범)으로부터 잔인한 배신을 당한 그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밀스런 구원의 빛은 다름아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도 좋고 정이라고 해도 좋다. 처음 봤을 때 부터 줄곧 그녀 주위를 맴도는 종찬(송강호)이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인 종찬은(신애가 말했듯) 가장 속물적인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솔직하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 말없이, 서두르지 않고, 진심으로 그녀 주위를 맴도는 모습에서 바로 그가 그녀에게 있어 비밀의 빛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따뜻하게 온몸을 감싸주는 오월의 햇살같은 빛.

 

영화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전도연의 연기도 좋았고, 시종일관 무거웠던 분위기를 중간중간 덜어준 송강호의 연기도 좋았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몇 장면들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비밀의 빛. 저 보이지 않는 햇살 속에는 분명 비밀스런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어서 창문을 열어야지. 그리고 저 햇살을 온몸 가득히 들이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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