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중에서

시월의숲 2007. 8. 24. 11:59

  "나는 삶을 사랑해. 난 자유로워. 이렇게 여행하다 보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잖아? 오늘 너를 만난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껴. 인디언 바구니 짜는 법을 백인들에게 강습한 적이 있지. 그때마다 난 말했어. 당신들이 만든 바구니에 기쁨을 담으라고."

 

 

 

*

 

  "중세시대의 성당을 알아?"

  "성당?"

  "하나의 성당이 완성되려면 삼사백 년씩 걸렸던 성당들 말이야. 거기 하나하나 벽돌을 놓던 인부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애에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

  그는 편지봉투에 성당과 인부를 끄적여 그리면서 말했다.

  "결국 우리가 그 사람들과 같지 않을까.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고 해도, 결코 그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없어."

 

 

*

 

 

그날 아침 8번가를 따라 걸으며 보았던 제라늄꽃을 잊지 못한다. 더러운 담벼락, 슬리핑 백 속의 홈리스들, 보도블록의 낙서들과 주말 밤에 팽겨쳐진 쓰레기 더미를 지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심어져 있던 선연히 붉은 꽃. 지상에서 가장 추하고 더럽고 혼돈스러운 거리 위로 그것은 피어 있었다. 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바람과 햇빛과 흙과 물만 있으면 저렇듯 혼자서 아름다운 것이다.

 

 

*

 

 

  "사랑 없이는 고통뿐이라구."

  "하지만 때로는"하고 나는 반문했다. "사랑 그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나요?"

  마흐무드는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그렇지 않아."

  그의 음성은 숙연했다.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

 

 

그런가 보았다. 우리는 좀더 쾌적한 집과 점더 많은 수입, 좀더 나은 생활을 동경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는가 보았다. 정말 귀중한 것은 값나가고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 숨쉬는 공기와도 같았던 것들, 가장 단순하고 값나가지 않는 것들, 평화, 우정, 따뜻함 같은 것들이었나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귓바퀴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진리가 어느 날 가장 생생하고 낯선 메시지가 되어 가슴에 꽂힐 때, 그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인지.

 

 

-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