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장정일, 《보트 하우스》, 프레스21, 2000.

시월의숲 2007. 12. 26. 10:39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크게 구해내는 건 사랑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랑은 반복의 지옥에 빠진 우리를 번쩍드어 단숨에 변화의 신세계에 올려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맘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희망이다. 그것은 반복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반복 가운데서 쉬게 하고 힘을 얻게 하며 그 곳에서 자유를 얻게 한다.(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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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가구들 중에 가장 위엄있고 고상한 것은 의자다. 어떤 의자든지 인격을 가지고 있고 개성을 가지고 있다. 장롱이나 침대는 살아있는 사물처럼 보이지 않아도 의자는 살아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의자가 갖추고 있는 여러 가지 기능적인 부분들과 생김새는 충분히 의인화시킬 수 있다. 정면에서 바라본 의자의 등받이 앞쪽은 얼굴이고 등받이의 뒷면은 척추의 외관을 띤다. 바닥은 배고 팔걸이는 팔이다. 그리고 네 다리는 좀 불가해한 채로 인간의 두 다리를 닮았다. 이처럼 의자는 인간의 와관을 띨 뿐만 아니라, 어떨 때 보면 가장 치열하게 생각을 하고, 뼛속까지 고독하고, 늘어지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인간 내면의 갖가지 풍경마저 응축하고 있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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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의 보트가 잘 있는지 묻는다. 물론 나의 보트는 멀쩡하고, 보트 하우스도 그대로 있다. 나는 보트 하우스의 주변과 내부가 항상 잘 정리되어 있기를 바라고 보트 역시 최상의 상태로 준비되어 있길 바란다. 발목을 가볍게 적시는 해변의 파도는 나를 먼바다로 초대한다. 바다의 부름에 바람이 난 가슴은 한껏 부푼다. 그러나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설지 말지는 아직 딱 부러지게 결정하지 못했다. 얼음이 있으면 콜라가 없고 콜라가 있으면 얼음이 떨어지곤 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얼음 재운 콜라를 마시며 비치 파라솔 그늘 아래의 긴 의자에 누워 쉬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거기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얼음 재운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나는 차가운 멸시의 눈으로 보트 하우스를 쳐다본다. 성스럽고 상스러운 마리아여, 유혹해 보라 마리아여! 불어라 바람이여, 손짓해보라 파도여!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온통 하얗다.(290~2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