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은희경,《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창비, 2007.

시월의숲 2008. 1. 22. 17:36

그때부터 나의 공상이 다시 시작됐어요. 가령 이런 거예요.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고 수줍은 나도 있고 말 잘하는 나도, 어리석은 나도, 그리고 아름다운 나도 혐오스러운 나도 다 있어요. 그것들은 흩어져 존재하지만 어느 한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 갑자기 사람들의 눈에 띄게 돼요. 외롭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내게 와서 말하죠. 어제 시장에서 욕설을 퍼부어며 물건값을 깎고 있는 천박한 너를 보았어. 어제 극장의 로얄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오페라를 감상하는 우아한 너를 보았어. 비닐하우스 안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오이를 따는 늙은 너를 보았어. 챙 넓은 모자를 쓰고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는 평화로운 너를 보았어. 남자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울며 뒤쫓아가는 미친 너를 보았어.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일을 잊어요. 세상에는 닮은 사람들이 많은 법이고 그리고 한사람이 동시에 여러 장소에 나타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죠.

 

 

- <고독의 발견> 중에서

 

 

*

 

 

B는 여전히 평범하게 살고 있다. 그리고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렇다고 해서 상상까지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체념한 듯 조용히 헤엄치던 수족관의 물고기에게도 아주 가끔 온몸을 비틀어 파닥거리며 위로 뛰어오르는 짧은 순간이 있다.

 

 

- <날씨와 생활> 중에서

 

 

*

 

 

―선배가 생각하는 진화란 게 뭐예요?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인간들은 다르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사는 곳도 다르고 먹이도 다르고 천적도 다르고, 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야.

―왜 그렇게 지도를 열심히 보세요?

P선배는 피식 웃었다.

―좌표 읽는 것은 내가 풀어본 중에 가장 쉬운 2차방정식이야. 원점 O가 확실하면 P의 위치는 구할 수 있는 법이거든.

―P의 위치가 구해지면 가야 할 방향이 보이겠죠?

―아니.

다음 순간 P선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내 등 너머 어딘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 <지도 중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