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언수, 《캐비닛》, 문학동네, 2007

시월의숲 2008. 3. 16. 12:32

그러나 나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의사는 아니며, 공군에 근무한다고 모두가 전투기 조종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기가 거꾸로 날거나 논두렁에 처박혀서 경운기의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선 누군가 그 큰 바위를 제대로 갈아끼우고, 비행기 이곳저곳을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하며, 또 누군가는 깃발을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조종사와 비행기만으로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폼나지 않는 일을 해줘야만 비행기가 논두렁이나 하수구에 쳐박히지 않고 하늘을 제대로 날 수 있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거다.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들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성숙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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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아무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해요. 전기가 발명되고 매머드 도시가 등장한 이후로 현대의 밤은 일종의 교란상태에 빠져 있죠. 게다가 자본주의가 선물한 최고의 유산은 바로 불안이에요. 보험, 증권, 부동산, 주식…… 현대 경제는 불안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알다시피 불안은 숙면의 최고의 적이에요. 그리고 불면은 다시 불안을 만드는 악순환이 진행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재거으로 외적으로 늘 불안한 겁니다. 반대로 원시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영적인 존재였죠.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일하는 시간이었고 해가 지고 나서는 꿈을 꾸고 쉬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신의 섭리에 따르면 삶의 반은 일하고 나머지 반은 꿈을 꾸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78~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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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자신이 이쑤시개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건과 인간이 서로 닮아 있는 미래 사회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22세기에는 탁자도, 꽃병도, 술잔도 인간들처럼 사랑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받으며, 지독한 외로움에 떨게 된다는 말일까? 아니라면 22세기에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도 않고, 서로 미워하지도 않아서 외롭지도 상처입지도 않은 채 저 물병처럼 저 탁자처럼 그저 자기 자리에서 우두커니 살아가게 된다는 말일까.(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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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라, 재미있는 말이군요. 고향이라는 말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머물죠. 거기서 밥을 먹고,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죠. 축구도 응원하고 단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친구가 되기도 하죠. 하지만 한국에서 저는 잘못된 시간을 살았어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뭔가 잘못되어 있었던 거죠. 저는 이제 행복한 삶이 뭔지 압니다. 멀리멀리 돌아서 여기까지 왔어요. 저는 고향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가끔씩은 고향을 잊어버리고 유목민이 되어야 하죠."(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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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