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럴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시월의숲 2009. 2. 2. 00:21

그냥 무작정 버스를 타고 싶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싶었다. 버스를 타면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던 생각들이 가라앉을 것 같았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정리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버스를 탔다.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했고 버스기사는 생각보다 친절했다. 차창 밖을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들에 실증이 날 때면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얼굴표정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모든 것들이 우연이었고 우연이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 내렸다. 방학이라 그런지 캠퍼스엔 학생들이 거의 없어 한적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더욱 충만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학생들이 없는 그곳엔 새내기들의 호기심과 생기도, 복학생들의 한숨과 담배연기도, 사랑을 시작한 이의 들뜬 열정도 없었지만, 건물들의 조용한 침묵과 정원에 고인 햇살과 그 햇살을 타고 다니는 바람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나는 아직도 대학의 낭만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어느 한 가지 주제에 사로잡혀 서로 열변을 토하며 이야기하던, 학문에의 그 순수한 동경을 나는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낭만이 있다고 믿는 나 자신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일까.

 

교정을 거닐다가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한가하게 독서나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참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아무렴 어떤가. 내 방식대로의 사치를 부리며 천천히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여러번 나왔는데, 펜을 가지고 가지 않아서 페이지를 따로 적어놓지 못했다(나는 책에 줄을 긋거나 책의 한 귀퉁이를 접어두는 것을 싫어한다). 어떻게할까 생각하다가 가방에 모아둔 버스표를,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와있는 페이지마다 꽂아 두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갈 때와 마찬가지로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았고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버스를 탈 때부터 나는 내가 끝내 쓸쓸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행위 자체에 이미 쓸쓸함이 묻어있는 것이다. 그 풍경들과 무수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도대체 나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럴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때때로 나를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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