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겨울 일기

시월의숲 2009. 1. 12. 18:46

1.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니 좌변기에 고인 물이 얼어 있었다. 실외에 있는 화장실이라 어제 저녁 몰아친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언 것이다. 황당했다. 혹시 수도관이 얼었나 해서 물을 내려봤는데 다행히 물은 내려갔다. 다만 거대한 얼음이 좌변기 중앙에 떡하니 빙하처럼 자리하고 있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자연스레(?) '언 발에 오줌누기'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언 좌변기에 오줌을 눠도 괜찮을까? 어쨌건 올해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2.

텔레비전을 트니 동파사고 뉴스가 계속 보도되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동파사고 신고건수가 서른 건이 넘는다는 보도와 함께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화장실마저 사용하지 못해서 걱정이라는 주민들의 인터뷰 장면이 흘러나왔다. 대책이라고는 날이 풀리는 것 뿐이라는 말에 다소 어이가 없었으나, 추운데 별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며칠 동안 계속 추울 거라는데, 큰일이다.

 

 

3.

아침에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다짜고짜 밥 굶지 말고 지내라는 말을 하셨다. 혼자 지내면서 제일 힘든일이 밥 챙겨먹는 일이라며 귀찮아도 꼬박꼬박 밥을 챙겨먹으라는 것이다. 나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느나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내가 먼저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 때문이다. 할아버지를 보면 인간은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아마 그래서 할아버지의 전화가 더 쓸쓸하게 느껴진 것일게다. 순식간에 얼어버리는 건 수도관만은 아닐테니까.

 

 

4.

오늘밖에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추운데도 불구하고 오후에 미장원에 갔다. 머리 깎은지가 얼마나 되었더라? 목 위로 짧게 쳐진 머리가 어느새 목을 덮고 있었다. 생각같아선 더 기르고도 싶었으나, 상사의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스타일을 살리지 못할바에는 그냥 짧고 단정하게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잘랐다. 미장원에 들어간 지 삼십 분도 안 되어 미장원을 나왔다. 칼바람이 얼굴과 목덜미를 베고 지나갔다. 나는 깜짝깜짝 놀라며 목도리를 칭칭 동여메고 경보하듯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에 롯데리아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버거세트를 샀다. 버거세트를 들고 나오면서 잠시 할아버지 생각이 났으나, 뭐 굶는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5.

그렇게 겨울을 지나고 있다. 겨울의 한 가운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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