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믿을 수 없이 치명적인

시월의숲 2009. 5. 13. 20:11

1.

진정으로 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날이었다. 바람은 선듯선듯하고, 햇살은 눈부시고 따뜻하며, 하늘과 구름은 거짓말처럼 파랗고 하앴으며, 나무는 저마다 다른 연둣빛으로 물든 오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중간고사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학교 혹은 도서관 근처에서 수다를 떨며 봄날씨를 즐겼다. 시험 때문에 학교를 일찍 마친 것이 오히려 무슨 휴가라도 되는 것처럼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한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저들에게는 마치 아무런 근심도 없는 듯 느껴진다. 그런 것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내일의 시험은 시험이고 오늘 시험을 끝낸 것에 대한 홀가분함 때문일까? 아니면 따사로운 날씨에 취해 모든 것이 좋게만 보이는 나 때문인가. 이런 봄날,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꽃가루처럼,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

 

 

2.

요즘 내가 많이 피곤한가 보다. 잠을 많이 자도 피곤함이 가시질 않는다. 이건 잠을 많이 잘수록 더 피곤해진다는 차원이 아니다. 이 피곤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화창한 봄날씨도 내 이런 피곤함을 덜어갈 순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건 피곤함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지쳐가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일상의 반복, 지루함의 반복, 피곤함의 반복, 이런 반복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야 하는 것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마음에 맞는 사람과의 대화, 그것 뿐일지도 모르는데. 아, 왠지 나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3.

저녁엔 불쌍한 나를 위해 라면에다 계란을 넣어 밥을 말아 먹었다. 원래 계란 넣는 것을 싫어하지만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파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계란을 푼 라면을 먹으면서 뜬금없이 조금만 본능에 더 가까워지면 어떨까 생각했다. 내 본능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인다면 내 삶이 조금이나마 달라지지 않을까. 그게 어떤 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현될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이성적 시선을 걷어내고 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매혹적인 일일지 모르지만 또한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있는 신종 바이러스만큼이나 치명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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