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비극적인 낭만, 낭만적인 비극

시월의숲 2009. 8. 21. 21:24

1.

덥다. 올 여름은 이상하다 싶게 에어컨을 트는 일이 없었는데, 요 며칠 계속 에어컨을 틀고 일을 했다. 코스모스가 활짝 피고, 잠자리가 온 하늘을 뒤덮더니, 이젠 늦더위가 기승이다. 내년부터 사람들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늦게 여름 휴가 계획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구월이나 시월 쯤에는, 오전에는 에어컨을 틀고 저녁에는 히터를 틀어야 하는 기막힌 날들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나날들이. 아, 이 얼마나 비극적인 낭만, 아니 낭만적인 비극인가!

 

 

2.

퇴근을 하고 틈틈히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읽고 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은 쌓여만 가는데, 나는 책을 빌려서 읽고 있고, 어제는 인터넷으로 몇 권의 책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살 때는 반드시 읽겠다는 마음으로 사놓고 왜 책장에만 꽂히면 그 책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 책은 언제든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게 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것일까? 하긴 사서 읽고 싶어도 절판된 책들은 어쩔 수 없이 빌려서라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지금 읽고 있는 <가면의 고백>도 그런 책이다. 사고는 싶지만 이젠 더이상 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 책. 이 책을 다 읽을 때쯤엔 주문한 <금각사>가 도착할 것이다.

 

 

3.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나이는 제각각이며, 외모, 학력, 옷차림, 말투, 분위기 등도 모두 제각각이다. 똑같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모두 인간이라 불린다. 다 같은 인간이지만 결코 다 같지 않은 인간들. 그런데 세상엔 이 단순명쾌한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해왔고, 그렇게 행동해왔으며, 결정적으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어쩔 것인가?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읽고 있으니 문득 다수의 시선, 다수의 윤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 다수의 생각에 알게 모르게 짓밟힌 소수의 사람들의 발작적인 독백이 미시마 유키오의 음성을 통해 들려오는 듯하다.

 

 

4.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이 자신의 본모습이라며 태연히 거짓을 연기하는 자의 비극을 우리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의 내면에는 소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알지 못할 엄청난 불안과 알 수 없는 죄의식이 늘 그의 영혼을 난도질하며, 그리하여 죽임과 죽음에의 잔혹한 상상만이 그의 영혼을 잠시나마 구원한다. 때때로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들에 대한 묘사는 대체로 관능적인 색채를 띄고 있고 상당히 낭만적으로까지 느껴지지만, 그 낭만의 대부분은 비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비극적이어서 눈부신, 결코 떨어지지 않는 가면. '정상인'의 가면과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은 그러한 차이가 난다.

 

 

5.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 당신은 당신이 말한 비정상의 사람은 아니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말 따위로 나눌 수 있는게 아니거든. 우습지 않아? 당신은 그저 당신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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