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웅진지식하우스, 2009.

시월의숲 2009. 10. 23. 21:50

  

 



일단 미시마 유키오의 화려한 문체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의 초기작인 <가면의 고백>에서도 느꼈지만, <금각사>에서의 물 흐르듯 유려하고 화염처럼 뜨거운 문체는 내 맘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일어의 번역일 뿐인데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번역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금각사>에 담긴 묘사들은 마치 금각이 빛나듯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 금각사에 가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나 역시 소설의 주인공처럼 실제로 금각을 보게 된다면 아마 실망을 금치 못하리라. 금각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가 터무니없이 클 것이므로. 하지만 금각사를 처음 본 순간, 그것에 대한 인상은 뇌리에 깊히 박힐 것이며, 시간이 얼마쯤 지난 후에야(주인공이 그러했듯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나타난 금각은 절대적인 눈부심과 끝없는 어둠, 깊은 허무로 내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할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묘사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과 고독, 허무의 감정은 하나의 문장이 개개의 낱말로 흩어지고, 결국 그 형체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절처럼 부서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화염에 휩싸인 금각이 그 영원성을 잃어버리듯. 금각을 불태워버린 주인공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 삶이란 금각을 태워버리기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질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금각을 태워버린 후에 다시 '살아야지' 라고 말했지만, 과연 그는 금각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을 지배한 그 금각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금각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그것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그것을 몸소 해내었기 때문에. 그것을 절대적인 미에 대한 질투라고 해도 좋고, 자신이 가진 근원적인 결핍, 불안, 고독에 대한 항거라해도 좋다. 어쨌든 그는 머무르지 않았으니까. 그것을 젊음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젊음은 주위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자신 또한 태워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광기를 항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젊음은 죽고, 생은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