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이설, 『나쁜 피』, 민음사, 2009.

시월의숲 2009. 8. 9. 22:06

 

 

 

책을 고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나의 경우 제목이 눈길을 끄느냐 혹은 글쓴이가 누구냐에 따라 책을 고른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나, 대체로 그런 편이다. 작가에 대한 소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아마도 제목을 보고 고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번에 읽은 김이설의 <나쁜 피>가 그러했다. 나는 김이설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나쁜 피'라는 제목은 오래도록 내 눈 속에 머물렀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 <나쁜 피>와 제목이 같아서였을까? 이 소설은 일단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겉표지의 그림이 인상적이었으며, 소설을 읽으면서는 주인공 '화숙'의 위악적이고도 냉소적인 태도가 가슴 깊이 남았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나쁜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화숙 일가에 대한 이야기다. 악취로 들끓는, 그래서 두통이 사라지지 않는 천변 근처에서 오락실을 경영하고 있는 화숙. 그녀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말은 병신 딸도 병신일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따라붙은 그 말을 떼어내기 위해 그녀는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에게 남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결핍과 삶의 모욕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아무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아니, 일찌감치 모든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더더욱 악착같이 위악과 냉소에 몸을 맡겨야 했는지도 모른다. 폭력적인 외삼촌 밑에서, 정신지체인 엄마 밑에서, 알콜중독자인 할머니 밑에서, 바보같은 외사촌 수연 곁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수연의 딸 혜주 곁에서, 그녀는 천변 저쪽의 삶이란 꿈이라는 사실을 절감했기에 더욱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녀가 진정 원한 것은 무엇이었나? 평범한 삶, 그것이었다. 사회가 평범한 삶이라고 암묵적으로 규정지어놓은 그 삶을 살지 못하는 운명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아, 내가 너무 감상에 젖은 말만 늘어놓은 것 같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결코 감상이란 끼어들수 없음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책 뒤의 해설에도 나오지만,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는 위악적 주인공의 이야기라면 으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연민에 젖어 읊조리는 감상성이 흘러들 여지가 많지만, 김이설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인 화숙은 독자들에게 쉽사리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감정을 이입하기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숙이라는 인물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바라게 되는 착한 사람이라거나, 점차 착해지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녀는 외삼촌의 폭력을 싫어하면서도 그 그늘 밑에 안주하며, 그것을 자신의 분노를 삭히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고, 또 스스로 수연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급기야 외삼촌이 경영하던 고물상의 주인이 되고 나서는 자신의 유년시절 트라우마까지 벗어던지게 되는 것이다. 아, 이 지독히도 징그럽고 비참한 아이러니라니! '나쁜 피'는 그렇게 순환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혹은 진실이라는 말일까?  

 

읽는 동안 정신이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지는 느낌이었다. 그 칼로 모든 인간관계의 고리를 끊어낼 수만 있다면. 하지만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그 폭력은 결국 죽음을 낳는다. 죽음은 일시적으로나마 인간을 각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각성된 인간은 삶을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가? 그리하여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가?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아니, 그건 대답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혹은 일종의 깨달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리라. 다만 소설 속 화숙과 그녀의 가족들(피가 섞이지 않는 진순을 포함해서)이 부디 그러하기를 바랄 뿐.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화숙의 커다란 심호흡이 내 어리석은 바람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아, 나도 크게 심호흡을 해야지. 그래야 어떻게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