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휴머니스트, 2004.

시월의숲 2009. 11. 8. 21:41

 

 

"어떤 예술가도 매일 스물네 시간을 쉼없이 예술가로 있을 수는 없다. 예술가가 이루어낸 본질적이고도 지속적인 것은 모두 아주 드물고도 짧은 영감의 순간에 창조된 것이다.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시대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역사(歷史)도 그와 같아서 결코 쉬지 않고 창조자 노릇을 하지는 못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머리말 중에서

 

 

그래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예술가의 창조물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네 역사의 아주 드물고도 짧은 영감의 순간에 창조된 '별 같은 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느 한 순간, 찬란히 빛나며 그 후로도 기나긴 빛의 꼬리를 인간의 삶에 드리운 한 장면에 대해서 말이다. 그 순간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때이기도 하고,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한 때이기도 하며, 헨델이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쓰는 때이기도 하고, 루제가 하룻밤만에 저 위대한 혁명의 찬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쓴 때이기도 하며,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때이기도 하고, 괴테가 그의 말년에 다시 청춘의 불꽃과도 같은 열정으로 <마리엔바트 비가>를 지은 날이기도 하며, 로버트 F. 스콧이 두 번째로 남극에 발자국을 찍은 날이기도 하며, 스위스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레닌이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독일을 통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날이기도 하다.

 

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들 중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별이 있는 것처럼, 슈테판 츠바이크에 의해 걸러진 역사적 장면은, 길다면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당당히 살아남아 그 생생한 빛을 발한다. 하지만 그가 고른 역사의 여러 장면들은 반드시 모든 인간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준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운명은 때론 그 운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의 머리 위에 내려 앉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태평양을 보았지만 결국 잉카 제국을 정복하지 못하고 죽은 발보아가 그랬고, 나폴레옹을 워털루 전쟁에서 패하게 만든, 너무 신중하고 고지식했던 그루쉬가 그러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승리한 자의 이름만이 찬란히 빛나게 되는 잔인한 역사라는 무대에서, 이처럼 무대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간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내 숨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체적으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인간의 역사를 그저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바꾼 운명적인 순간들을 끄집어 내어 보다 극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네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장면이 있었음을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된다. 그것은 역사적 장면을 눈에 보일듯, 혹은 소설처럼 풀어내는 그의 글솜씨 때문일 것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서 다시는 창조적인 영감이 떠오르지 않음을 절망한 헨델이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메시아를 작곡하는 장면을 한 번 보라. 죽음에서 삶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구원으로 이르는 헨델의 심리가 절로 느껴지지 않는가! 하느님의 목소리가, '메시아'의 선율이 되어 들리지 않는가! 톨스토이의 미완성 희곡 <그리고 어둠 속에 빛이 비친다>에 바치는 작가의 에필로그는 또 어떤가!

 

책에 실린 열 두 편의 역사적 순간들 모두가 재밌고 흥미로웠다.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운 책이라서 그런걸까? 세계사에 어두운 내가 읽기에도 전혀 부담이 없었다. 역사가 채우지 못한 빈 공간, 건조한 사실의 기술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영광과 좌절의 순간들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넣은 작가의 솜씨가 놀라웠다. 슈테판 츠바이크처럼, 문학적 상상력을 겸비한 작가라면 어떤 글을 쓰던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 책에 대한 생각이 집약된 머리말!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제목도 좋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머리말이 마음에 들었다. "단 한 번의 긍정이나 단 한 번의 부정, 너무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늦거나 하는 일이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개인의 삶, 민족의 삶 심지어는 인류 전체의 운명의 흐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라니! 최소한 그의 글에서만큼은 인류 역사의 몇몇 장면들이 다른 어떤 예술품보다도 위대하고 숭고하며 창조적인 예술품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역사 그 스스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정작 '그'가 아니었다면 그 빛이 그렇듯 생생하게 빛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