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내 이름은 빨강

시월의숲 2009. 11. 19. 21:33

언제나 이름에 관해서 생각해왔다. 내가 가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타인에 의해 불려지는 이름. 나를 지칭하고, 때론 내가 그것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는 이름. 예전보다 개명절차가 까다롭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바꾸고 있다고는 하지만, 웬만해서는 쉽사리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진 이름. 살아가는데 특별한 불편함이 없다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지어준 이름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 맨 처음 자신에게 지어질 이름은 자신이 지을 수 없다.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가진 채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 이름이란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불려질 때는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름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어지고 불려진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에서는 어떨까? 사이버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개인은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닉네임이라는 용어로 명명되는 그 이름은, 자신의 실제 이름이 가진 타자성과, 한자 획수의 규정과, 형제나 자매간에 대물림되는 돌림자의 엄격한 규정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채로우며 기상천외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붙여진 이름은 자신이 가진 상상력과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개성의 표상이 된다. 그것은 분신처럼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며, 자신의 성격이나 외모와는 전혀 다른 무엇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그 모든 권한이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한마디로 사이버상에서 닉네임은 자기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강제하려 한다면? 누군가 네 닉네임은 한글로 지어야만 해, 라고 못을 박는다면? 이것은 내가 가입한 어느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다. 물론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에서 영어나 이모티콘 혹은 특수한 문자가 들어간 닉네임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쓰고자 하는 자의 자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말은 충분히 수긍할만하고 다른 이들에게 적극 권할만하다. 나또한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온 차였다. 하지만 그것을 강제한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닉네임은 자신의 개성의 표현이자 고유의 권한에 속하는 것인데, 그것을 권유나 권고가 아닌 강제를 한다는 것은 개개인이 지닌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많이 아쉽다. 좋은 취지의 의견에 강압이 끼어들면서 그것의 좋은 점까지 무색해져 버리는 일을 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닉네임 하나 바꾸는 것에 내가 너무 심각하게 반응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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