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자화상

시월의숲 2009. 11. 13. 21:21

장마도 아닌데, 며칠째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비는, 천천히, 조금씩 흩뿌리듯 내렸다. 한낮에도 짙은 먹구름 때문에 사방이 온통 회색빛이었고, 땅 위엔 빗물이 고인 자리가 수두룩히 생겨났다. 휴교를 한 학교가 많았지만 신종플루 때문인지 거리엔 아이들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비가 오고 춥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모두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빠르게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동차는 비를 맞으며 축축한 도로를 내달렸다. 비에 젖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희미하게 번졌다.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다가 빗물이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들여다보았다. 어딘가로 스며들지 못하고 고여있는 빗물. 마치 울음을 참고 있는 여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같았다. 누군가 살짝 손끝만 갖다대어도 왈칵 눈물을 쏟아낼것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 다만 빗물이 하나 둘 씩 조그만 웅덩이에 얇은 파문을 일으킬 뿐. 순간, 땅으로 스며들지도, 하늘로 사라지지도 못하는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그 공공연한 비밀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을. 우물에 얼굴을 비춰본 윤동주처럼, 빗물이 담긴 웅덩이에 얼굴을 비춰보면 알 수 있을까. 밝은 달과, 구름과, 하늘과 파아란 바람과 한 사나이. 밉고, 가엽고, 그리운, 추억같은 사나이를.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이름은 빨강  (0) 2009.11.19
어느 순간  (0) 2009.11.17
흔들리는 것들  (0) 2009.11.11
내가 바라본 세상  (0) 2009.11.02
사회생활의 정의  (0) 2009.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