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맨』, 그책, 2009.

시월의숲 2010. 4. 26. 18:00

 

 

영화로 먼저 알게 된 책이다. 톰 포드가 만든 영화 <싱글맨>의 예고편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화려한 영상 속에 굵은 뿔테안경을 낀 콜린 퍼스와 긴 속눈썹에 짙은 화장을 한 줄리앤 무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흐르는 음악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개봉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중에 개봉을 하면 꼭 볼 생각이다. 예고편을 본 후,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검색을 해보고 나서야 그것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행히 소설은 시중에 판매되고 있어서 볼 수 있었는데, 예고편에서 보았던 미스테리하고 스타일리쉬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보다 진지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영화의 예고편만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좀 웃기긴 하지만, 뭐 어쨌거나.

 

소설 <싱글맨>은 대학교수인 주인공 조지가 자신의 동성애인인 짐을 교통사고로 잃고 난 후의 어느 하루를 다루고 있다. 그날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잠에서 깨어나고, 씻고,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웃을 만나고, 병문안을 가고, 친구인 샬롯의 저녁식사에 초대받고, 제자인 케니를 만나서 바닷가에 뛰어 들어 수영을 하고... 하루만에 일어나는 조지의 일상과 그에 따른 내면의 흐름을 일인칭이 아닌 삼인칭 시점으로 들여다본다. 이 소설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그러한 시점과 의식의 흐름 같은 것들인데, 이것이 이 소설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한다.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자신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동성애자인 조지의 내면을 더욱 그럴싸하게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셔우드 자신은 한번도 싱글맨이었던 적이 없었다니,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인 조지보다는 조금 행복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조지가 지닌 상실감은 어떻게 그렇듯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상실감이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가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상실감이란 인간이 지닌 공통의 감정, 즉 보편성에 닿아 있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이 소설을 쓸때가 예순살이었으니 인생에서 누군가를 잃은 후 밀려오는 상실감 정도는 아마도 몇 번 쯤, 혹은 많이 느껴보지 않았을까? 더구나 그는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인 것이다. 조지의 제자인 케니가 항상 미사일 반대가 적힌 뱃지를 달고 다니는 것에서 그 시대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어쨌거나 상실감은 그 상실된 존재의 기억이 흐려지게 되기까지 그림자처럼 대상을 따라다닌다.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있음을 느낄 때, 밥을 먹거나, 차를 타거나, 혹은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짐의 빈자리는 항상 조지에게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끼게 한다. 그가 했던 말, 그가 자주 짓던 표정, 그의 뒷모습, 그의 손가락과 어깨의 선이 불쑥불쑥 조지의 눈앞에 나타나 그를 순간 마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조지는 또한 살아있다. 자신이 사랑했던 짐은 죽었지만, 그래서 이 세상에 없지만, 조지는 아직 살아있고, 아침이면 눈을 떠야하고,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조지를 둘러싼 사람들이 조지를 보며 조지에게 바라는 것, 조지가 조지여야 하는 이유를 대라고 무언의 눈빛으로 요구한다. 그래서 조지는 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조지는 하루 종일 자신을 연기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다시 눕는다. 아침에 일어났던 그 방, 그 침대에서. 살아있는 한 그래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게 소설은 아침에 조지가 자신의 방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해서 저녁에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자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하루 동안, 그는 짐의 부재를 곳곳에서 느끼고, 이웃들과 세상 사람들의 동성애자에 대한 차가운 멸시에 분노하기도 하고, 친구 샬롯의 은근한 유혹을 거부하며, 제자 케니의 젊음에 흠뻑 빠지기도 한다. 그것이 상실감을 치유해가는 과정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듯 하다. 온갖 유혹과 분노와 상실감은 살아있는 자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조지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끝날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새로운 '짐'을 찾으라고. 과거는 과거로, 미래는 미래로 놓아두고 현재를,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매력적인 소설이다. 영화의 예고편을 먼저 봐서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이 부분은 어떻게 영화로 그려질까, 하는 생각이 때때로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소설로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리고 더욱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을 살라고 하는 메시지는 늘 그렇듯 내게 위안을 준다. 적어도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있음이 확실히 느껴지는 것이다. 이건 절대로 감상적이거나 거창한 말이 아니다. 진실이 순수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