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진중권, 『교수대 위의 까치』, 휴머니스트, 2009.

시월의숲 2010. 2. 22. 23:16

 

 

 

모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비교적 빨리 읽어내려간 책이다. 이는 책의 내용이 쉬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재미있었다는 뜻이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라고 해야할까? 작가 자신도 책에 실린 열두 점의 그림들이 언젠가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들이라고 고백하고 있거니와, 이 말은 비단 작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지적인 재미, 그러니까 아, 그게 그런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구나, 하는 일종의 지적 쾌감이 그의 글에는 있었다. 미학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유명한 진보논객으로서 사회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특유의 화법으로 화제를 낳곤 하던 이력 때문일까? 이 책은 단순히 미술사적으로 기념비적인 그림에 대한 사화문화적, 기법적 해석을 담은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직접 고른(일반적으로 미술사에서 의의가 있는 그림이 아닌) 그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교수대 위의 까치>라는 제목만 보아도 여타 그림에 관한 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가? 이는 어느정도 작가 자신이 지닌 자의식의 산물이겠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전혀 거부감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대한 두 개의 층위를 끌어온다. 하나는 '스투디움'이라는 것인데, 이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인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해석과는 상관없이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개별적인 해석, 효과를 의미하는 '푼크툼'이다. 그는 사진에 대한 이런 두 개의 층위를 회화에 끌어들여 '스투디움'보다는 '푼크툼'에 입각하여 그림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꽤 어렵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틀에 박힌 해석이 아니라 나름대로 독창적인 해석을 해보겠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선택된 열두 점의 그림들은 실제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들이었다. 물론 그 호기심은 작가의 심미안이 아니었으면 나같이 무지한 독자들은 알아차리기도 힘든 그런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설명을 따라 그림 속으로, 그 시대 속으로, 화가의 내면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그 그림이 담고 있는 비밀을 파헤치기도 하고 혹은 더 큰 비밀에 휩싸이기도 하는 경험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듯한 아찔함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읽는 듯한 스릴감(작가는 이 작품의 모티브인 '다빈치 그림 속의 요한이 실은 마리아'라는 설정이 미술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내놓을 수 없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라고 폄하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을 동시에 느꼈다고나 할까? 조르조네의 <폭풍우>의 경우, 그림 자체에서 오는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 한 점의 그림에서 발생하는 거의 서른 개에 가까운 해석들을 대할 때면 어찌 아찔함과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하네스 굼프의 <자화상>에 등장하는 거울에 비친 화가 자신의 시선 처리와 사라진 주체는 또 어떻고?

 

그의 글을 읽으면 호기심이라는 것도 어쩌면 완벽한 무지에서는 탄생하기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라는 작품을 처음 본(그림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가장 먼저 들법한 생각은 우선 이게 어느 시대를 묘사하고 있는 그림인가, 혹은 교수대 위의 까치는 어떤 의미인가 하는 의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무지에서 나오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한 의문을 해결한 후에야 비로소 작가가 지적한 것처럼 교수대의 묘사가 현실 공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과 나아가 그것이 부조리라는 현대적인 개념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작가는 일반적 해석의 틀이 아닌 개별적인 느낌인 '푼크툼'에 입각해 이 글을 써나갔고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푼크툼'보다는 '스투디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스투디움에 의해 푼크툼이 가려지거나 휘둘려저서는 안되겠지만, 일단 일반적인 해석을 알아야 독창적인 해석도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본다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결론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뜻밖인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깨달음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적 호기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관심(취향)있는 분야에 대한 공부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