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열화당, 2007.

시월의숲 2010. 2. 19. 23:29

 

 

 

<도둑일기>의 작가인 장 주네가 자코메티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쓴다면 과연 어떨까? 나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장 주네의 시적이면서도 광포하며 무언가를 응시하고 감응하는 듯한 그의 독특한 문체와 자코메티의 고통스러우면서도 단절되고, 거칠면서도 우아하고 슬픈 조각상들 간의 묘한 이끌림이 있었으리라고 단정했다. 당연하게도 그 단정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떤 만남은 그 자체로 이미 완결되어 버리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하는데, 주네와 자코메티의 만남이 내게는 그러했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는 단순히 자코메티의 작품들에 대한 해석 혹은 감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장 주네라는 누구보다 독창적인 작가에 의해 씌여진 개별적인 예술론이라고도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장 주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코메티의 조각상과 묘하게 일치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 주네는 말한다.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런 상처를 찾아내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주게끔 하려는 것 같다(7쪽)"고. 그런데 장 주네의 소설도 바로 그렇지 아니한가! 그 앞 문장의 '자코메티'를 '주네'로 바꾸면 충분히 장 주네에 대한 예술론으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는 말한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존엄성, 뿌리 깊이 단절되어 있어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렴풋한 인식을 의미한다(26쪽)."고. 그러한 고독을 장 주네는 자코메티의 조각상과 자화상에게서 발견했다. 이 아름다운 예술론은 바로 그러한 고독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고독에게로 수렴된다. 

 

이것은 결국 장 주네 자신의 예술에 대한 내밀한 고백과도 같다. 감상이라는 행위를 통해 예술 작품에 숨겨져 있는 '나'의 비밀(장 주네에게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에 담긴 비밀은 바로 고독이었고, 그 고독은 바로 장 주네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둘의 고독은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개별적인 것이다.)을 발견하거나 혹은 내 안에 담긴 고독을 통해 예술 작품이 가진 고독을 발견해내는 것. 무릇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이란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예술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기법이나 시대적 상황 혹은 유파나 철학 같은 것들을 숙제처럼 암기하여 뜯어보는 것이 아니라 우선 정서적 교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장 주네의 말처럼 '나의 고독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에게 인정받거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에 털끝 하나의 감동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은 1+1=2 라는 단편적이고 명백한 지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지식의 습득으로 인해 예술작품의 감상이 한층 풍요로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러한 지식의 습득으로 인해 생기는 깊은 정서적인 교감을 체험해보지 못했다. 많이 아는 것과 깊이 교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2라는 숫자가 내게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지식의 습득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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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다. 그러므로 내가 사로잡혀 있는 필연성에 대항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일 수밖에 없다면 나는 파괴될 수가 없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나, 그리고 나의 고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본다."(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