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영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시월의숲 2010. 5. 2. 19:58

 

 

 

아마도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김영하란 작가를 그리 매력적이라 생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김연수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그 혹은 그의 작품을 '오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도 아닌 여행에세이를 집어든 것 말이다. <퀴즈쇼> 이후 소설보다는 여행에세이를 내는 것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는 김영하의 여행기는 과연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제. 제목도 제목이지만,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부제에서 풍기는 서정성이라니. 그러니까 나는 '시칠리아'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이국적이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이 책을 집어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칠리아' 혹은 '시실리'는 이탈리아에 남부에 위치한 지중해 최대의 섬이고,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와 내리꽂히는 태양으로 가득한 곳이며,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그리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식민지였으며, 여러 나라의 침입을 받았고, 지진으로 어머어마한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무채색의 돌과 그 돌로 만든 성벽과 성채, 성당과 도로들, 고개를 들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저 멀리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유명한 관광도시의 유혹적이고도 자극적인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마치 흑백 사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풍경의 도시들을 김영하는 걷고, 그곳에서 잠을 자고, 그곳의 음식을 먹고,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권의 책을 써냈다. 모든 여행기가 특별하다면 아마도 그건 그러한 글 속에 그곳 특유의 자연환경과 사람살이가 작가의 개성에 의해 표현되어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또한 지중해의 뜨꺼운 태양과 건조한 바람에 상당부분 빚을 지고 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김영하는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주로 기차로 여행하며 발길 닫는 곳의 역사와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시칠리아의 엉망인 철도 시스템에 읽는 나까지 분개하곤 했지만, 고생한 기억이 더 오래 가는 것처럼, 끔찍한 교통시설의 불편함은 오래도록 시칠리아의 풍경을 그의 기억 속에 머무르도록 해 줄 것이다. 그럴거라는 생각이 든다. 김영하를 통해 본 시칠리아에는 압도적인 풍경이나 사람의 시선을 단숨에 빼앗는 외형적인 화려함은 없었지만 대신 그 안에 오래도록 축적된 시간이 있었고, 시간이 담긴 돌이 있었고, 그 돌로 만든 건축물들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신화가 있었다. 신화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과 태양, 바다 같은 것들이 찰나의 존재일 뿐인 우리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어쩌면 시칠리아는 그저 평범한 여행의 상징으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 혹은 잊고 있었던 것들이 실재로 존재하는 곳은 아닐까, 하는 감상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김영하의 글은 생각보다 무미건조하고 그래서 안타깝게도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가 시칠리아를 보고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이 내겐 특별하게 다가왔다. 감상적이라 해도 좋다. 어떤 이유로든 매혹을 당한 곳은 감상적이 될 수 밖에 없을테니까. 이미 매혹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감상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는 왜 시칠리아에 갔는가? 왜 굳이 시칠리아여야 했을까? 그는 서문에서 자신 안의 잃어버렸던 예술가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너무 앞만 보며 달려온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선택한 장소가 바로 시칠리아라는 것이다. 왜? 시칠리아의 무엇이 그를 이끈 것일까? 이전에도 몇 번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생각했다. 그저 그곳에 시칠리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간 것이라고. 어쩌면 지중해의 태양이(알베르 카뮈처럼!) 그를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결국 작가는 자신 안에 존재했었지만 잃어버렸던 예술가를 다시 찾아내었을까? 시칠리아가 그에게 예술가를 찾아주었을까? 그의 메마른 영혼에 생기와 창조력을 불어넣어 주었을까? 그 대답은 아마도 그가 내게 될 다음 책에 들어있을 것이다. 아마 그때쯤이면 나도 그에 대한 나만의 '오해'를 풀기위해 다시 그의 책을 집어 들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