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문학동네, 2007.

시월의숲 2010. 3. 6. 20:48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을 표현하기 힘들 때가 있다. 그 느낌이 나빴을(?) 때보다는 좋았을 때 더 그렇다. 나는 대체로 책이 재미없었더라도 그 책의 장점을 말하려고 노력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재미없었던 책의 장점을 말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책의 장점을 말하는 것보다 더 쉽다. 그러니까 무척 감명을 받은 책에 대한 말을 하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어렵다는 뜻이다. 읽고 아! 하는 탄성이 새어나오고, 무언가에서 깨어나는 것 같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던 기분, 그 느낌, 그 상황, 그때 떠오르던 상념들을 단순히 좋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어휘의 빈곤, 문장의 빈곤을 절감할 때도 바로 그 순간이다. 최근에 읽은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내겐 그렇듯 표현하기 어려운 감명을 준 작품이었다. 단순히 좋았다, 라는 말 외에 어떤 말을 해야할까? 어떻게 좋았다는 말을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을까? 좋았다는 말조차 불완전하기가 이를데 없는데!

 

짤막한 단편들이 빼곡히 담겨있는 이 소설집은 문체가 거친듯 하면서도 유려했다. 내용은 로알드 달의 소설처럼 약간 강박적으로(단순히 로맹 가리와 비교했을 때) 반전을 향해서 달려가는 듯한 인상이 아니라 반전이 있을 것을 암시하면서 느긋이, 하지만 단호하게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반적인 느낌은 로알드 달 보다는 무겁고 깊다(당연하다고?). 이런 비교가 가능하다면, 로알드 달이 모차르트라면 로맹 가리는 브람스나 베토벤 쯤? 너무 터무니없는 비교일지도 모르겠다. 로알드 달과 로맹 가리는 애초에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브람스나 베토벤은 또 어떻고! 어쨌거나 로맹 가리의 소설은 그 자체로 고유한 울림이 있다. 그의 소설에는 인간에 대한 냉소와 조롱, 위로와 긍정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이를 한데 어우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지닌 고독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 너머로 개개의 인간이 지닌 고독을 그는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독에서 그는 일말의 희망을 읽는다. 내가 그를 너무 긍정적으로 읽고 있는 것일까? 희망이란 너무나 가벼워서 함부로 말해져서는 안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래, 희망을 이야기하기 전에 인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선구자로서의 인간, 현재로서는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 그의 소설을 읽으면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류트>나 <어떤 휴머니스트>, <벽>, <역사의 한 페이지>, <가짜> 등. 이 모든 작품들이 하나같이 우리가 믿었던 것들, 혹은 우리가 추구해왔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후의 참담함을 다루고 있다. 그것을 배신이라고 해도 좋고, 불신, 오해, 혹은 한 세계의 붕괴라 해도 좋다. 그러한 무너짐 이후 우리가 다시 믿어야 할 것, 메달려야 할 것,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로맹 가리는 바로 그러한 무너짐의 순간까지만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이후의 판단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류트>의 백작 부인처럼 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류트를 연주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가짜>의 남자 주인공처럼 가차없이 부인과 이혼을 하거나, <본능의 기쁨>에서처럼 사랑을 찾아 떠날수도 있겠고, 좀 극단적이지만 <벽>에서의 남녀처럼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방법은 없다. 절망에 빠졌을 때 빠져나오는 길은 사람마다 다 다르므로. 로맹 가리는 다만 절망에 빠지기까지의 상황을 냉소와 조롱, 풍자로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무릎을 치거나 때론 히히덕 거리면서 그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생각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고. 그리고 그것은 '새들은 왜 페루에 와서 죽는가?' 라는 물음과 묘하게 겹쳐진다. 책을 읽고나서 제목이 더욱 시적으로 다가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렴풋이 인식하고는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것. <새들은 페루에 와서 죽다>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로맹 가리식 대답이다. 인간은 아직 오지 않았고, 진정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의 인간이란 선구자에 불과할 뿐.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아직 인간이 오지 않았다는 인식은 절망이지만, 진정한 인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희망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내가 읽기에 로맹 가리의 소설은 희망보다는 절망에 더 가까워보이지만. 그래도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고 하지 않는가!

 

뜬금없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좋다'는 말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단순히 좋았다는 말 외에 어떤 말이 필요할까? 사실 그 이외의 말들은 모두 진부하고 언어로 내뱉어지자마자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좋다, 는 말의 주석에 불과할 뿐. 하지만 좋다는 말을 하기 위해 쏟아낸 수많은 말들이 결국엔 시가 되고,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말의 주석, 절망이라는 말의 주석, 인간이라는 말의 주석. 수많은 주석들. 결코 그 자체로 사랑과 절망과 인간이 되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그 모든 것들일 수 있는. 로맹 가리의 인간에 대한 주석은 절망적이지만, 그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리라. 그렇게 믿고 싶다. 어디선가 낙담과 불신, 절망을 넘어서 진정한 인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로맹 가리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인간이 되었는가? 인간의 선구자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는가? 영원히 들을 길 없는 로맹 가리의 대답이 무척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