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더 많은 음악보다는 손으로 만져지는 음악을!

시월의숲 2010. 6. 20. 23:00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음반가게에 간 적이 있다. 아버지는 한참이나 고민을 하더니 결국 나훈아의 LP를 고르며 흐뭇해 했었다. 그때 LP의 값이 얼마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본 LP판은 내가 아침마다 들여다보던 세숫대야의 크기와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식하게 거대하기만한 크기의 음반이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음반인 만큼 그 시절을 생각하면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고 있는 듯 아련함이 밀려온다. 역시 터무니없이 큰 오디오(그때는 전축이라고 했었지)에 딸려있는 LP 플레이어에 판을 넣고 음악이 흘러나오길 기다린다. 판을 긁는 특유의 지직거림 뒤에 따라나오는 나직한 음악 소리. 지직거리는 소리처럼 LP의 시대가 가고 작고 앙증맞은 CD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이젠 CD의 시대도 저물어가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음악을 보이지 않게 사서 들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더 많은 음악과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더 많은 용량의 첨단기기들을 장착한채.

 

이런 시대에 CD를 사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일일까? 아직도 낡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몇 곡 밖에 들어 있지 않은 CD를 비싼 값에 사서 듣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인터넷으로 음반을 사면서도 그런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요즘처럼 mp3니 뭐니 해서 적은 돈을 들이고도 좋아하는 가수들의 음반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시대에 말이다. 더구나 마음만 먹으면 컴퓨터 한 가득 몇 천곡이나 되는 음악을 저장해 놓을 수 있는 이 시대에!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수없이 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요즘이야말로 음악감상이 더 힘든 시대가 아닐까? 무엇이든 너무 많으면 어찌할 줄을 모르는 법. 또한 너무 많으면 어느 것 하나를 온전히 감상할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음악을 너무 많이 듣다보면 무슨 음악이 무슨 음악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마치 여러가지의 과자를 한꺼번에 먹다보면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어지는 것처럼. 물론 그 많은 음악의 홍수 속에서도 나름의 취항과 규칙에 따라 음악을 듣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음악을 듣다보면 어떤 절실함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건 비단 음악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인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수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쉽게 지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절실함과 온전한 감상이 아쉬워서 CD를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손으로 만져지는 것에 안심이 되는 것이다.

 

내 나이가 몇이더라? 아직은 아, 옛날이여를 부를 나이는 아닌데. 어쨌든 나는 이 시대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나는 너무 느리고, 촌스럽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지는 않으니 그걸로 됐다. 오히려 빠르게 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자신도 빨리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