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시월의숲 2010. 8. 18. 20:20

K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세 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의 슬하에는 네 살 난 귀여운 사내아이가 있으며 곧 둘째도 태어날 예정이었다. 몇 주 전에 나는 그의 부인과 아들을 본 적이 있는데, 어느 가족들보다 행복해보였으며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직장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K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우리 모두는 맥주잔을 손에 든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맥주잔을 비운 다음, 느릿느릿 말을 이어나갔다.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사람이 변심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아, 변심을 하는 경우는 허다하나, 그 변심의 이유가 직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면? 예를 들어, 같이 시험준비를 하던 연인이 있었는데 그 중 어느 한 사람만 붙고 나머지 한 사람은 붙지 못한 경우를 보자. 시험에 붙은 사람은 이제 안정된 직장과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고, 당연히 그의 부모들과 그를 위한답시고 충고를 마다하지 않는 주위의 사람들로 인해 새로운 신부감 혹은 신랑감을 찾으라는 압력을 받게 된다. 오랜시간 그와 사귀었던 사람은 이제 언제든 차버릴 수 있는 길가의 깡통보다도 못한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이런 상황이 드라마보다 오히려 현실에서 더 흔히 일어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아니, 그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오래 사귀었던 연인을 차버린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 전까지 죽고 못살던, 사랑한다는 말을 수백번도 더 했던, 따뜻한 말과 눈빛과 숨결과 손길로 표현되었던 서로의 감정은 다 무엇이었나. 나는 정말 그러지는 못하겠더라. 주위에서 헤어지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그는 이 부분에서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주위에 앉아있던 여자동료들은 모두들 감탄과 경외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술이 떨어졌고, 누군가 벨을 눌러 술을 더 시켰다. 새로 술잔이 채워지고 나서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해. 그때, 내가 시험에 붙었을 때,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듣고 그녀를 차버렸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러니까 같은 직장의 동료와 결혼을 하던가 아니면 다른 번듯한 직장의 여성과 결혼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 좀 후회되기도 해. 그리고 그렇게 결혼한 사람들이 좀 부럽기도 하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위에 있던 여자 동료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가 왜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사랑에 대해서,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도 지금 자신의 처지가 후회된다고 하는지 다들 골똘히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너무도 흔한 드라마의 에피소드를 보는 것 같아 자꾸 하품이 나왔지만 그가 너무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통에 자세를 고쳐잡고 진지하게 들어주느라 목이 다 아파왔다.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짓는 그의 표정과 말투가 기억에 더 남았다. 어쩜 그리도 연속극 배우 같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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