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밤이 지나간다

시월의숲 2010. 8. 26. 00:33

밤이 아까운 날이 있다. 낮엔 더위에 지쳐 개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이면 더욱 더. 처서가 지나갔고, 다행히도 비가 내렸으며, 그래서 기온이 좀 떨어진 날. 이런 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훑어보고, 블로거들이 올린 음식 사진과 이국의 풍경 사진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는 나 자신이 왠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밤. 내일은 제 시간에 퇴근을 하지 못하겠구나 미리 걱정하며 업무에 쓰일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 내가 더더욱 한심하게 느껴지는 밤. 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깊은 회의가 드는 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어디선가 라면 냄새가 흘러들어오고, 내가 보고 있는 음식 사진들과 냄새가 합쳐져 서서히 배가 고파오는 밤. 세상엔 저리도 많은 장소들과 저리도 많은 음식들과 저렇듯 다양한 문화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나는 한 곳, 한 음식, 한 문화에만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왠지 서글퍼지기도 하는 밤. 이렇게 시간을 흘러보내고 있는 나 자신에 화가 나면서도 선뜻 행동하지 못하는 나약한 나. 무엇엔가의 기대로 충만한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아니, 그런 기대가 현실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이런 밤에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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