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폭염주의보

시월의숲 2010. 8. 20. 22:06

여전히 뜨거운 여름. 낮에는 뜨거운 불판 앞에서 땀을 흘려가며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이글거리는 태양볕을 뚫고 출장을 다녀왔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곳에 들어가 있는데도 더위가 가시지 않고, 엉덩이에 땀이 차서 자꾸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간 허름한 식당에는 모든 창문을 닿아놓은 채로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틀어놓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계산을 하면서 얼핏 거울을 보았는데, 내 얼굴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벌겋게, 마치 불판처럼 달아있었다. 이러다 정말 더위를 먹는 것이 아닐까 잠시 심각하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는데 대구가 36도를 넘어서고 서울도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찜통 속에서 숨을 쉬어야만 하는 모든 생물들의 괴로움이 느껴졌다. 다음 주면 처서인데, 처서가 지나면 좀 괜찮아질런지.

 

오래 전, 이십 년도 더 된 과거의 어떤 날에 내가 다녀왔던 곳을 오늘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가기 전에는 내가 그곳에 다녀왔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방문한다는, 약간의 설렌 기분마저 들었는데,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걸어가는 사이 눈에 익은 건물들이며, 테니스장, 물레방아와 초가집 같은 것들이 기지개가 켜지듯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 이젤과 화판, 파레트와 붓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미술대회 같은 것이었는데, 어디서 주최를 했는지, 내가 누구의 차를 타고 이곳에 왔는지, 그때 나를 지도하던 선생님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그렸는지는 똑똑히 기억이 난다. 그때가 가을이었음에도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다는 사실도.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온 날이었다. 오늘 다녀온 그 장소 뿐만 아니라, 오래 전 나와 어느 한 시절을 공유했던 사람의 전화가 나를 또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미약하게나마 이어져오던 관계가 끊어진 후(그 누구의 통보나 결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단절, 끝이라 부르기도 어색한...) 한동안 전혀 생각하지 않고 지냈었는데, 오늘 생소한 전화번호로 불쑥 현실의 내 삶에 나타난 그.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도 몰랐네, 내가 말하자, 바뀐지 오래되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구나, 네가 말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때때로 호명한 이름들이 내 귀에 들어와 박혔다. 그것은 마법의 주문처럼 어느 한 시절 그들과 함께 지냈었던 기억을 하나 둘 떠오르게 했고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나는 미래를 향해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과거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전혀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우연한 계기로 인해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을 보면. 어쩌면 과거란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내면에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쌓이는 눈 같은 것일지도.

 

이 모든 것들은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 속에 한없이 감기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내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 시간들, 장소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내가 과연 그 시간에, 그곳에, 그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걷고,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 그때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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