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태풍의 눈같은 고요

시월의숲 2010. 9. 7.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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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상륙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제와 오늘, 끊임없이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서 무척이나 조용했다. 가만히 앉아서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다른 소음들은 점차 들리지 않게 된다. 비가 소음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게다가 오늘은 평소보다 떨어진 기온에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가을이라는 말에는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들어있는 것인지. 좀처럼 물러갈 것 같지 않은 여름도 이제 조금씩 물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따뜻한 차를 마셔도 덥지 않은 날들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오겠지만, 이라고 쓰려다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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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었다.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오래 전에 읽었던 그녀의 <외딴방>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엄연히 줄거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일까? 여전한 그녀의 글솜씨. 차분한 분위기와 미묘하게 흔들리는 물결의 번짐과도 같은 문체와 그 안에 단단하게 응고된 자신만의 상처. 그것을 보듬는 따스한 손길과 눈길... '언젠가는' 이라는 말을 조용히 생각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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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같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태풍은 주위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죽이고, 뿌리 뽑지만 정작 태풍의 눈이라 불리는 중심은 조용하기 이를 때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태풍같은 사람이란 주위의 모든 사물들,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면서도 정작 그런 자신의 내면은 고요하기만 한 사람일텐데, 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렇지 않은듯 연쇄살인을 저지른 살인마? 혹은 아주 호의적인 표정으로 거짓말만 늘어놓는 사기꾼?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파괴되고 말 것인가, 그의 내면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태풍의 눈같은 고요란 평화로운 고요는 아닐 것이다. 평화를 가장한 고요 혹은 불길한 침묵같은 것일지도.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의 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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