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연히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지

시월의숲 2011. 5. 21. 15:42

  "당연히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지."

 

  내가 지넷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소설의 제목을 내 메신저 닉네임으로 올린 것을 본 어떤 이가, 뭐 이렇게 당연한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렇죠? 당연히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죠?"

  나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 문구가 실은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의 제목이라는 말을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렌지로 표상되는 다수의 이념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불합리한 폭력과 압제 등에서 벗어나 당당하고도 진정한 '나'로 우뚝 서고 싶은 주인공을 그린 소설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한듯 받아들이는 그 사람 앞에서 그런 설명은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당연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일을 먹으라고 하면서 오렌지만 내밀고 있지는 않은가. 오렌지말고도 다양하고 맛있는 과일이 셀 수 없이 많음을 우리는 잊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문제는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렌지만이 과일인 줄 안다는 것이다. 이 모순적인 말 앞에 나조차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직까지도 거대하고 불합리한 통념에 지배되고 있고, 오로지 어떤 한가지 생각만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너, 다수의 생각에 젖은 너는 거대한 불합리와 차별과 강요라는 말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을까. 주위의 누군가가 소수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너.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이해와 인정 대신 오해와 비난, 저주를 퍼붓는 너. 오렌지만이 과일인 줄 아는 너. 그러면서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너.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하리라. 이 세상과,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색채와 저마다의 온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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