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아무런 슬픔도 없이

시월의숲 2011. 6. 22. 20:31

오늘은 아침부터 후덥지근하더니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내일까지 집중호우라고 하던데, 가뭄이 좀 해갈되었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걸 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낮에는 무더워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끈적거리는 불쾌감이 있었는데,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상쾌해진다. 어렸을 때 나는 왜 그리도 비 오는 걸 싫어했을까? 비만 오면 이상스레 우울해지는 내가 싫었고, 빗물이 새는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고, 그래서 그런 날은 하루종일 축축한 양말을 신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정말 싫었고, 뻑뻑한 우산을 접었다 펼쳤다 할 때마다 손가락이 끼어서 아파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싫었기 때문에? 하교할 때쯤 내리는 비에 건물 현관에는 우산을 챙겨든 부모들이 가득 모여 있었는데,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집까지 데려갈 누군가는 오지 않고, 오더라도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가 많이 슬퍼했던가? 어쨌거나 비오는 날은 왠지 항상 슬펐고, 지금도 슬프고 앞으로도 슬플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이런 비유는 참 유치하지만, 비가 오면 꼭 누군가 울고 있는 것만 같다. 그 누군가는 누구인지, 나에게 무엇인지, 자꾸만 묻고 싶어지는 저녁. 비오는 저녁. 지금은 예전처럼 비가 올때마다 우울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내리는 비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슬픔도 없이. 슬픔에도 내성이 생기는 것일까? 그것을 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를 잊는다는 것. 누군가를 잊어간다는 것. 누군가 잊혀진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소중한 사람을 잊는 댓가로 얻어지는 뻔뻔함 혹은 비겁함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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