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잠시만 나를 안아줄 수 있겠니?

시월의숲 2011. 7. 6. 00:34

영덕 가는 길에 청송의 양수발전소와 주산지, 얼음골에 들렀고, 영덕의 풍력발전소와 바다를 보고 왔다. 정말 뜻밖의 여행이었기에 조금 얼떨떨 했지만 하루만에 멋진 곳을 많이 보고 온 것 같아 왠지 뿌듯한 마음이 든다. 오늘은 어제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태양은 자주 구름에 가려져 그늘을 드리웠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청송과 끝간데 없는 바다를 가진 영덕은 무척이나 대조적이면서도 어떤 동경심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었다. 동경심이란 자연이 가진 침묵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청송의 산에서는 풀벌레들의 울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영덕의 바다에서는 파도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미미하여 보이지 않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산과 바다가 자신 안에 거대한 침묵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은 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자연에게서 느끼는 표현하지 못할 모든 감정의 정체 혹은 비밀은 바로 침묵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우리는 조금 걸어서 주산지에 도착했고, 믿을 수 없이 커다란 잉어를 보았고, 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물버들 나무를 보았다. 그곳의 모든 것들이 어쩐지 조금씩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예전에 보았던 김기덕의 영화 때문일까? 영화에 나오는 물 위에 떠 있던 작은 암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영화를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걸어서 주산지를 나왔고, 차를 타고 얼음골로 향했다. 얼음골에 있는 약수터에는 에어컨을 틀어놓은 듯 차가운 바람이 불었으며, 맞은편의 커다란 바위산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텐트가 쳐저 있었다. 아마 여름이 조금더 깊어지면 이곳도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얼음골을 나와서 옥계 계곡을 지나 영덕 강구로 향했다. 풍력발전소에 들러 프로펠러 돌아가는 것을 잠시 구경하고(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노물리라는 곳에서 회를 먹고 근처 바닷가를 거닐었다. 커다란 방파제와 크고 작은 배들, 어촌마을 특유의 비린내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와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등대.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지금 바닷가에 와 있음을, 바다와 대면하고 있음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그래, 나야 나, 내가 널 만나러 왔어, 너의 깊은 침묵으로 잠시만 나를 안아줄 수 있겠니? 그렇게 바다를 향해 어리광을 부렸던가.

 

산이 나를 채워준다면 바다는 끊임없이 나를 비우게 한다. 아무런 말 없이, 하지만 언어 이상의 거대한 몸짓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