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7번 국도

시월의숲 2011. 12. 11. 15:03

이사를 했고, 이삿짐을 정리했고, 방을 닦고, 세탁기를 돌리고 밥을 먹었다. 이삿짐 센터의 직원들은 무거운 짐들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옮기는 것 같았다. 새로 이사온 집은,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지 좀 더 포근하고, 깨끗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 많지 않은 짐이라지만 그래도 정리하는데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정리하다가 힘이 들면 그 자리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시작하곤 했다. 집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고쳐야 할 것들이 꽤 있었다. 싱크대의 수도는 물이 새고, 설거지를 하고 그릇을 담아놓을 곳이 없고, 세탁기와 연결된 수도는 호수의 이음새가 헐거운지 물이 새고, 방의 전등은 세 개나 달려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 밖에 켜지지 않아 침침했다. 그리고 커튼이 없어서 밖의 건물이 훤하게 내다보였다. 사야 할 것, 고쳐야 할 것 등을 메모지에 적어 놓았다.

 

이 와중에도 어제 저녁에는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 이사를 하고 인터넷을 연결한 뒤였다. 아직 풀지 않은 짐들 사이에 짐짝처럼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있는데 순간 책을 반납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납기한이 며칠 지났다. 한동안은 책을 빌리지 못할 터였다. 반납해야 할 책은 김연수의 <7번 국도>였는데, 사실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 읽지도 않은 책을 반납하러 가야한다는 사실이 어딘가 이상했으나 어쨌든 빌린 건 빌린 거니까. 이사를 와서 좋은 점은 도서관이 걸어서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점이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아직 낯설었고, 남루한 행색의 건물들을 지나쳐야 했다. 부서진 건물과 옹색한 간판의 주점과 밥집들, 무척 오래되었을 것 같은 여관의 붉은 네온사인들은 내가 아직 이곳에서 이방인임을 알려주는 지표들처럼 보였다. 가끔씩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어깨를 움츠린 채 바삐 제 갈길을 갔다. 도서관의 일반자료실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토요일과 일요일은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고 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도서관 입구에 있는 무인반납기에 반납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새로 빌리지도 못할 거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그건 낯설고 남루한 골목길에 내린 어둠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환하게 불을 밝힌 편의점에 들어가 김밥과 컵라면을 샀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와 김밥과 컵라면을 먹고, 남은 짐을 정리하고 텔리비전을 좀 보다가 잠을 잤다. 꿈을 꾸었는데, 텔레비전에서 본 의문의 살인사건과 용의자에 대한 것이 나왔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 아직 찾지못한 시신과 알 수 없는 범인의 행적. 삶은 그렇게 의문투성이인채로 흘러간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어떻게든 흘러가게 되겠지.

 

눈부신 햇살, 파란 하늘, 그 아래 펼쳐진 바다를 따라 길게 뻗어있는 7번 국도를 생각한다. 갑자기 왜이렇게 7번 국도를 타고 싶은 것인지.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그 책을 빌려야겠다. 어쩌면 아직은 읽을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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