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둠의 뼈

시월의숲 2012. 7. 1. 19:03

여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선선한 바람의 날들이 지나고,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의 날들도 지나고, 이제서야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비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무더위와 함께.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더운 공기 때문에 어제는 온 몸이 나른하고 무기력했다.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집에 다녀왔는데, 가기 전에 몇 번이고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결국은 빗속을 뚫고 다녀오긴 했지만, 그토록 몸이 싫어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했다. 몸이 아니라 실은 마음의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일주일만에 본 아버지는 벌에 손이 물려 벌겋게 부어오른 것 외에는 여전해 보였다. 담장에 벌집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앞에서 고무호스를 정리하다가 벌에 쏘였다고 했다. 입으로 계속 독을 빨아냈다고 했는데, 과연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손의 부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저녁식사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선지국을 먹으러 갔다. 우리 고장에서 꽤 역사가 깊은 선지국집인데,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나는 선지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마땅히 먹을만한 것이 없었다. 국에 담겨 있는 검붉은 선지 덩어리를 아버지의 국그릇에 덜어놓고 나는 국물과 건더기를 먹었다. 배가 고팠기에 밥 반그릇을 더 먹었다. 아버지와 나는 선지국을 먹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식당을 나오니 비가 그쳐 있었고, 우리는 할아버지가 살았던, 지금은 아버지와 나의 집이 된,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의 물건들을 거의 다 처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새로이 리모델링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려고 누운 방바닥 저 깊은 곳에서 할아버지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익숙한 듯, 그리운 듯, 늘 외면하고, 코를 틀어막고, 락스를 풀어 청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가시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냄새. 그것은 벽돌의 뼈, 나무의 뼈, 지붕의 뼈, 창문의 뼈, 모든 것들의 뼛속 깊숙히 가 배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나는 놀라 고개를 들어 집안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어둠이 제자리에서 고요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어. 너는 그냥 네 길을 가면 돼. 새로운 칠월이 시작되었고, 내일부터는 또다시 새로운 환경 속으로 들어가게 되겠지. 그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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