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오, 그대

시월의숲 2012. 6. 6. 00:49

내가 살고 있는 사택의 입구에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금도 피어있긴 하지만 이젠 지고 있다고 말해야 하리라.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장미꽃을 보는 일은 뭐랄까, 나한테만 허락된 축복처럼 느껴진다. 한창 그 붉음이 절정에 달했을 때, 문득 사진을 찍고 싶다는 격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평소에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나로서는 무척 의아한 일이었다. 그만큼 장미 자체의 붉음과 탐스러움, 수백 송이의 장미꽃에서 뿜어져나오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리라. 그 경이와 아름다움을 좀 더 오래 잡아두고 싶어서. 나중에 질 일이 벌써부터 안타까워서. 아니다. 장미가 한창 피었을 때는 그것이 질 때의 안타까움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압도적인 힘으로 내 시선을 잡아끌었고, 마음을 사로잡았고,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출근을 하는게 다 무슨 소용이야?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야, 너는 이 시간 속에서 무얼 하고 있지? 너는 언제 나처럼 보란듯이 너를 피울 수 있겠니? 그렇게, 장미꽃이 내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아침 공기에 싸인 붉은 장미 군단 앞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은 열심히 지고 있기에 더욱 찬란한, 그대 앞에서 내가!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숙한 고독과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  (0) 2012.07.06
어둠의 뼈  (0) 2012.07.01
뮤지컬!  (0) 2012.05.28
잘 지내나요  (0) 2012.05.21
걷기만 하네  (0) 2012.05.08